Temple Stay I (미황사-딸끝마을-)

1. 새로운 여행문화

금년 미국독립기념일을 전후한 휴가는 한국으로, 그것도 어렸을 때 바닷가 모래사장에 비스 듬히 앉아 멀리, 아주 멀리 아물아물하게 보이던 창해에 두둥실 떠있던 섬나라에 가보자고 계획을 짲다. 집에는 아이들이 와있기로 하고 우리 노부부만이 한가롭게 떠나는 여행이어서 별로 준비해야할 것도 없이 달랑 가벼운 손가방하나 식 들고 오전 1시에 새벽 비행기를 탔지만 미지의 섬나라, 그것도 우리말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섬에 가서 일주일 이상 머문다는 생각을 하니 어린애가 되어 가슴이 뿌듯해 왔다.
다음날 아침 7월2일 오전 7시, 우리는 일러준 대로 종각 전철역 5번 출구 맞은편 대로변에 위치한 “ㄹ”여행사 사무실 앞에 정차한 대형 관광버스에 오르면서 오늘부터 이웃이 되어 어울릴 초면들과 얼굴들을 익히며 두리번거리다가 안내하는 아가시가 찾아준 자리에 앉았다. 보슬비가 나리는 후줄근한 아침인데도 구릅을 지어 자잘 대는 여행객들의 마음은 아마도 우리와 같은 들뜨고 가볍게 흥분된 그런 것일 것 같았다. 버스가 서울 시내를 벗어나 간간이 산과 들이 제법 볼만한 시골로 접어들자 안내양은 우리의 일정과 참가자들을 대강 소개했는데 미국에서 우리부부, 일본에서 6명 그리고 나머지는 한국내 거주자들이었는데 겉보기에는 너나할 것 없이 대중이 없는 차림이라 금방 스스럼없이 어울릴 것 같았지만 구릅 구릅이 얼 키어 끼리끼리 노는지라 우리도 속편하게 남 눈치 볼 것 없이 바깥 구경도하고 스스로의 내심도 보면서 오락가락 구준 비 내리는 남도천리 길을 쉬면 가면 내려가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곳은 청해진 영화 차령장이 있는 완도 섬이다. 옛날에는 귀양이나 갈 외진 땅 끝이 마주 보이는 섬이라지만 지금은 연(連)육교가 있어 한 다름에 그 궁벽한 섬, 해적들을 물리치는 요새가 있었던 섬에 도착하였다. 영화세트가 이것저것 설치된 장면과 여기서 찍은 비데오들과 그곳에서 찍힌 영화장면들을 보면서 실물은 별로인 경치나 세트로 그렇게 멋지고 절절한 장면들을 묘사한 감독과 차령기사들의 능력을 찬탄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일정이 여기까지이고 2인 일실, 3인일실로 짜여진 방 열쇄를 배정받아 버스에서 내렸고, 곧바로 각기 배정된 모텔 같은 3류 호텔에 여장을 풀고는 어제까지의 여독을 풀어야 한다며 푹 쉬기로 하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6시에는 어제저녁에 미리 아침식사 집으로 알려준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들뜬 마음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선착장으로 자리를 옮기었다. 하지만 우리는 잘못하면 배가 결항되어 오늘 가기로 한 청산도에 갈지는 미지수라는 깜짝 놀랄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우리같이 무얼 모르는 사람들은 좀 가다리더라도 청산도행 배를 타야한다 하고 좀 여행을 다녀본 사람들은 보아하니 섬에 들르려는 꿈은 깨야하며 버스 기사말 대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차밭이 있는 보성이나 순천 쪽으로 변경하자는 것이었다. 옛날에도 그렇겠지만 지금도 진도 항은 이 지방의 해상교통요지라고 할 것 같다. 제주까지 카페리여객선으로 3시간이면 간다니 옛날에도 바람 받은 쾌속범선이면 한나절이면 도착할 거리가 아닌가? 날랜 군사와 하늘을 읽는 장군이 지휘하는 군선이면 제주에서 오끼나와(류구국)까지도 하루길일 것이라 생각하니 당나라산동, 일본구주, 경주외항을 같은 생활권으로 삼아 천하를 누비던 통일 신라국의 청해진 대사 궁복이 그 신분의 제약을 벗어나 그 장쾌한 경제, 군사 활동도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8시에도 청산도에서 우리를 태워갈 배를 뛰 우지 못했다는 소리를 듣고야 관광버스는 선착장을 떠났고 우리는 상의 한 대로 템풀스테이가 된다는 미황사가는 길에 내려주기를 부탁하였다. 물론 환불 안 될 거라 생각은하였지만 하여간에 겉 치례 사과말로 그냥 뒤 예정은 다 까먹고, 미황사행버스가 하루 두세 번 있다는 산정마을까지 가는 버스가 지나가는 북평마을에 내처졌다. 시골 다방에서 짠맛커피 한잔하고 시간이 정지된 상태로 얼마를 기다리다 마을버스의 외딴 경유지인 미황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1-끝)

2. 미황사 템풀스테이

8.8.서울올림픽이 열릴 무렵부터 불교사찰 특히 대한조계종을 중심으로 전국 명승지에 산재하는 절에서 체계적인 템풀스테이가 외국인들에게는 한국과 한국문화를 접하는 좋은 기회로, 내국인에게는 테마와 명산에서 심신을 충전할 수 있는 경제적인 관광문화의 한 패턴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 절은 아름다운 명승지에 유구한 역사를 안고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서 “오는 사람 머물게 하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자비의 근본 도량”으로 편하게 육체와 정신을 쉬어가도록 해주고 있다. 그러니 오늘 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템풀스테이가 있기 이전에도 갈 곳 없어 찾아와도, 지나가다 한밤 쉬어가거나, 잠간 무거운 다리를 녹이려 와도, 언제나 쉴만한 공간을 제공하였으며 배가 고프면 음식을 주고 마음이 상해있으면 이를 보듬어주는 일을 그냥 해오고 있었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하 수상해저서 많이 달라진 곳도 있고, 달라진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오는 것이 절의 오랜 풍습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갑자기 여행계획이 바뀌어 미리 예약을 하거나 알아보지 못했지만 무조건 템풀스테이를 하겠다며 금시초문의 미황사-미지의 절을 물어 버스를 타고도 아무 걱정하지 않으면서 절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미황사에 그럴만한 스페이스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다음을 기약하고 해지기전에 가까이 있는 도시 해남으로 나와서 숙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밤나무, 소나무, 편백나무, 꽃부채 같은 꽃잎을 달고 있는 비자나무, 칡덩굴이 어울러 진 산자락의 녹음방초(綠陰芳草)와 졸졸대는 맑은 실내 물소리로 가득한 간이 버스정거장에 내려 버스가 산 아래로사라진 후에도 주위의 그윽한 아름다움에 취해 말없이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오늘 애당초 우리 여행계획을 가라치운 그 무거운 안개가 완도의 해무와는 다르지만 우리의 안계(眼界)를 저 만치서부터 공(空)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똑 같아서 안내지도에 보이던 미황사 뒤 우뚝 솟아 병풍을 이루었던 달마산 바위들의 위용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담하고 단청이 잘 된 산문을 합장하고 지나니 앞에 고색이 창연한 누마루 건물이 보이고 자(紫)하(霞)루(樓)라는 현판이 금빛 안개로 쌓여있을 이 건물 평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잘 알아차리게 하였다. 들어가는 길옆에 수행전문 사찰이니 묵언(黙言)하라는 뜻의 부탁하는 표시판이 군데군데 서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참선하는 스님들과 가끔 그 사이에 끼어있을 유발 수행자가 한데 어울려 인생의 일대사를 풀기 위에 화두 일매, 좌선삼매에 들어 있을 것 같아 발자국을 주기며 사무실을 두리번거려 찾아냈다. 개와(蓋瓦)불사를 하는지 절에서 가장 낮은 건물에 들어있는 사무실 밖에 안쪽 기와장마다 하얀 매직펜 자국을 뒤집어쓰고 줄줄이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옆으로 난 작은 조각문을 밀며 인사를 하고 찾아온 뜻을 말했더니 다행히 예약이 없는 방이 두 개식이나 남아있었다. 우리가 쓸 방은 샤워시설이 생략된 방이어서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공동화장실과 샤워를 이용해야 한다며 낳은 방이 나는 대로 그런 불편을 덜어주겠다고 귀 띰 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방만해도 우리에겐 너무 고맙고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세탁이 된 침구와 수련복을 내주면서 2시간 뒤 6시에 목탁소리가 나면 저녁공양이 있고 7시에 저녁예불, 예불이 끝나면 법당 앞을 도는 행선(行禪)이 있고 함께하는 차담(茶談)시간을 끝내면 오늘 일과는 끝난다고 했다. 내일 일과는 4시 반에 새벽 예불과 메디테이션시간에 행선과 좌선이 있고 6시 아침식사 후 함께 일하는 “울력”이 있을 수 있는데 별다른 이유가 없으면 모두 참가하는 것을 권장한다고 하였다. 이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자유 시간으로 휴식, 독서, 참선, 관광이나 등산 등 자유롭게 시간을 즐기는데 사내에서는 묵언을 원칙으로 한다고 템풀스테이 규칙과 생활안내를 해주었다.
우리들은 한국시골의 고향집에 온 듯, 가벼운 기분으로 가방을 풀어 정리하고 휴식을 취했다. 몸이 나른해 오는데 저녁공양 목탁소리가 울리어 공양 간에 가니 뷔페식당 같이 밥, 국, 나물이며 김치 등이 자기 입에 맞게 덜어다 먹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바리공양을 외국인에게도 맞게끔 느긋하게 바꾸어 논 준 “바리공양”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해서 우리 둘만의 4박5일, 미황사 템풀 스테이는 시작되었다.(2 끝)

3. 지묵스님과의 차담

미황사는 한반도의 최남단 땅 끝에 있는 사찰로 아름다운 마(磨)석(石)이 쭝긋쭝굿 키를 재며 장관을 이루고, 해가 바다위에 마지막 황금 빗살을 반사하며 일몰할 때 멀리에서 보면 마치 금색치마를 두른 달마산정에는 수많은 부처가 서있는 것 같이 보여 그 경관이 빼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안내문에 보면 미(美)황(黃)사는 신라경덕왕 8년(단기3082년/서기749년)에 의조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무의스님(고려)이 도솔암 북쪽 서(西)굴에 있었는데 그곳은 신라시대 의조스님이 그곳에 있던 낙일관(落日館)을 수리하여 살던 곳”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골자기(서쪽)에는 미황사와 통교사가 있고 중국의 송나라(남송)사람들은 이 절의 주산격인 “달마산을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라고 칭송했다”고 기록하였다. 미황사의 많은 기록들이 창건 후 700여년이 지난 뒤인 정유왜란(서기1597)때 다 불타버리고 그 소실된 역사를 주어모아 숙종18년(서기1692)에 행(전)병조판서 민암이 미황사 사적비(갑골문을 닮은 古風한 예서체로 좌에서 우로 “美黃寺碑銘”라 새겨저 있다)를 써 세운 비가 지금도 부도전 앞에 폭 1.3X높이2.9m의 석비로 남아있다. 300여년 풍우에 씻기어 글자는 거의 마모되고 주위는 흙이 쌓였는지 아니면 배불하던 시절이라 민암이 이름을 들어내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비석의 반을 지하에 들도록 안치했는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실제보다 더 오래된 천년 유적같이 버려져 있는데 그나마 그 비석이 보존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이 절의 아름다운 창건설화를 전해주고 있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우방으로 멀리 서역(인도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을 포함)을 넘어 아라비아(대식국)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고 교역을 트던 시절, 의조라는 스님이 예전 백제시대의 실력자가 풍광을 즐기거나 공부(工夫)처로 삼았다가 나라가 망하자 버려진 낙일관을 수리하여 그때 이미 부처님도량으로 삼고 있었다고 한다. 전해 오는 절 이야기(미황사 비명(碑銘)를 풀어보면 대개 다음과 같다. <하루는 마을 어부가 절레 와 전하기를 사자포구에 돌배 하나가 닿았는데 배안에서 범패(梵唄-불교음악)소리가 들려오기에 가까이 살펴보고자 했으나 배에 가까이 가면 그 배는 번번이 멀어져 갔다고 다시 가까이 닦아오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조스님은 생각하신바가 있었던지 가까이 있던 장운, 장선 두 스님과 향도(香徒-화랑도인지 모르겠다)백 여명과 함께 목욕하고 정중한 모습과 환영하는 태 거리로 염불, 기도를 올리며 포구에 이르니 비로소 그 배가 바닷가에 닿았다. 배안에는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서있었고(살아있는 사람이었는지 금동상인지?), 화엄경80권, 법화경 7편과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 16나한 등과 금가락지와 검은 돌이 하나 식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성물을 바닷가에 내려놓고 모실장소를 의논할 때 검은 돌이 저절로 벌어지고 그 안에서 거문 소 한마리가 나와 문득 커졌다. 그날 밤. 의조스님의 꿈에 그 금인이 나타나 “나는 우전국(당나라 때 흥륭했던 고비사막 인근의 실크로드 위치한 부유한 나라)왕으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경전과 부처님모실 곳을 구하고 있었는데 이곳(사자포구)에 이르러 산(달마산) 정상을 바라보니 1만 불(佛)이 나타남으로 여기에 온 것이다. 소에 경을 싣고 가다 소가 누어 일어나지 않는 곳에 성상을 봉안하라”고 알렸다. 이에 그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한번 누었다 다시 일어나 걸어가더니 산골자기에 이르러 누어 일러나지 않았다. 처음 누운 곳에 통교사를 짓고 누워 일아 나지 않은 자리에 미황사를 지어 불상과 경전을 모시었는데 미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메--)에서 따왔고 황은 황금빛-금인에서 따왔다고 하였다>
역사적 사실과 이야기의 정황으로 보아 이보다 더 사실적인 사찰창건이야기는 없을 것 같다. 바다에서 보니 일만 부처님이 모인 듯 했다는 달마산모습이나, 실크로드-카시미르지역에 있다는 우전이라는 나라의 실제역사나 지금도 사(寺)하에 있는 우분(牛墳-소 무덤)리 등 고증이 가능한 사실과, 절 이름이라기보다는 통교(通敎)의 기념사당일 것 같은 통교사지 등도 알아볼만한 이야기 거리로 흥미 있게 남아 있다. 우리 초년생을 돌보시는 지묵스님이 손수 차를 끌이시며 우리들 이야기도, 물음도 들으시고 언뜻, 언뜻 들여 주시는 법문을 색이면서 미황사의 옛날과 지금을 어려서 문구멍으로 마당을 살피듯 역사와 현실을 가늠하는 것도 여간한 재미가 아니었다.(3 끝)
2010.7.23.

4. 새벽의 쇠북소리

새벽4시반, 적멸산중의 정막을 깨고 탁, 탁, “우렁-쩌렁”한 목탁소리가 잠자는 산새와 모든 유정(有情) 무정(無情)물 그리고 비구, 비구니, 남녀 4부대중의 무거운 잠을 깨운다. 이미 잠에서 깨어 어제 배운 대로 제법 가부좌를 하고 화두를 들고 있다가 얼른 일어나 양치질하고 켐풀스테이 첫날 받은 간단한 재색법복바지와 조끼를 유니폼 같이 갈아입었다. 박에서 들리는 염불소리에 귀를 기우려보지만 멀어졌다 가까워졌다하는 염불소리가 말과 가사리로 들릴 리는 없지만 지금쯤 아마 사방(四方)찬(讚)을 할 것 같다. 원래 도량(道場)석이라 해서 스님한분이 절 도량을 염불하며 도는 것은 새 하루를 열면서 부처님의 나라를 깨끗한 정토(淨土)로 거듭나게 하는 의식이다. 동, 남, 서, 북쪽, 사방을 향해 절하고 나서 절 구석구석을 돌거나 대웅전 뜰을 돌면서 깨끗해진 천상과 천하를 확인하고 이렇게 부처님의 세계를 여는 의식이다. 이렇게 한 결 같이 새벽을 열고 또 열다보면 염불하는 시자의 마음도 열리고 하늘 위와 하늘아래 모든 중생도 평안하게 되리라는 믿음도 생긴다.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 고시공부를 한다고 남한산성 장경사에 머물 때가 있었다. 병자호란 후 승병이 머물던 7개의호국사찰 중 오직 하나 남은 절이지만 그 때는 퇴락하고 가난하여 주지이신 오현(悟玄) 스님이 초등학교나 다닐 나이의 어린 사미스님한분과 시험 준비하러 온 필자가 있을 상주할 뿐이었다. 신도라고 해야 서문 박 중부면 마천리(서울시 마천동)에 사시던 몇 분이 처사와 보살이 고작이고 제사나 기도가 있을 때만 오기 때문에 일상에는 대학생인 내가 예불, 제사, 모든 절일을 상좌같이 주지스님을 따라했었다. 그래서 웬만한 예불문과 천수경을 척척해냈는데 주지스님이 덕안 사미와 서울에 가실 때면 3벽 세시, 남한산성 벌 봉 외성줄기를 따라 내려오는 무서움이 깔린 울창한 송림을 다 잊고 목탁을 치며 대웅전, 요사 채, 칠성당, 산신각 등 산중 곳곳에 있는 전각을 두루 찾아 도량석을 했던 시절의 기억이 전생같이 아득하게 보인다. 도량석이 목탁의 마지막 내림으로 끝이 나고, 대종의 웅장한 굉음(轟音)과 끊일 듯 이어지는 신묘한 여음(餘音)을 반복하며 지옥의 두꺼운 문을 녹이여 파하는 진언, 염불과 종소리는 마음의 파도를 가라 안치며 우주를 돌아 산중을 진동시킨다.
절과 암자에는 대개 우리 전통옹기를 거꾸로 매달은 것 같은 범종이 독립건물인 종각에 큰 나무기둥(당목(撞木)을 매달아 치는 대종과 대웅전 안에 있는 화엄성중단아래 마련된 작은 종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규모가 작은 암자에는 여러 가지 다른 모양과 기능의 소리를 내는 종이나 주발(周鉢)모양으로 하늘로 입이열린 종(鐘)도 있다. 이것들은 절에 있는 사물(四物)의 하나로, 운판, 목어, 북과 함께 불교의식에 요긴히 쓰여 진다. 운판은 둥근 동경이나 구름모양을 한 청동 판으로 나무채로 치면 뗑뗑 고음을 내는 데 하늘 신들을 깨닫게 하고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목어(木魚)는 배가 비어있는 물고기의 형상을 하였는데 그것을 나무 재로 때리면 딱딱 맑은 소리를 낸다. 수중생물과 수중영혼들을 건지는 소리로 이 목어의 축소판이 목탁이다. 목탁은 작지만 그 소리는 절 안 어데서도 들리는 음량이 있음으로 리듬을 맞추고 신호를 보내는데 알맞아 죽비, 주장자와 함께 스님들 손에서 떠나지 않는 물건이다. 목탁의 모습은 둥근 얼굴과 배, 입과 눈을 형상화한 소리통과 손잡이로 되어있다. 북은 짐승의 세계를 제도하기 위한 소리로 대북과 소북이 있는데 가장 세속적인 소리라 오늘날 한국의 북춤은 예술로 승화되어 한 장르를 일우는데 이것은 절의 타(打)북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앞서 말한 쇠북-종은 불교가 융성하던 시기가 청동기문화의 대중화 시대와 맞물려 강한 금속의 소리로 지옥문을 깨어 지욱의 무리를 자유롭게 하는 축원과 힘을 담은 소리를 내는 것으로 신라시대부터 웅장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신라범종으로 완성되었다고 본다. 한국의 전통농악에도 사물(四物)놀이가 있는데 꽹과리, 징, 장구, 북으로 구성되어 있고 농군의 행진, 일 노리, 흥을 돋우고 제신을 즐겁게 하는 장단과 굿거리 등이 그것이다. 같은 사물이지만 절과 마을의 소리가 각각 다르고 그 상징하는 바나 쓸모도 다른데 소리로 보면 징과 종이 가깝고 모양으로는 운판과 징이 닮았다. 4끝(다음호에 계속)

5. 종중의 왕-신라 법종

서양에도, 동양에도 종의 크기와 그 용도와 종류는 많고 많다. 너무 다른 종류의 종들이 있는데 서양의 종은 종 내부중앙에 있는 종(鐘)심(心)을 좌우로 흔들어 치거나, 종체(鐘體)를 상하로 들었다 내렸다하며 종심이 종체를 쳐 소리를 내는 것이 많다. 학교나 함선의 종은 전자의 예이고 후자의 예는 기독교 교회의 종각에 달아매져있는 것이 그것이다. 한국의 종은 청동(靑銅)범종(梵鐘)을 지칭하는데 옹기를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하고, 종신(鐘身)머리에 있는 정교한 용두(頭)를 종각 들보에 매달고 곡선을 그으며 밑이 좁게 빠진 종신 아래 땅을 둥글게 파 명(鳴)동(洞)을 만드는데 이것이 종소리를 지하로 전달, 지옥을 진동하게 한다. 또한 종신에는 하늘에 오르는 아름다운 비천상과 특별한 문양으로 장식되고 용두 옆으로 피리 모양의 음관이 있는데 현대의 과학적 조사에 의하면 10%정도의 높은 잡음이 이것을 통해 빠져나가 제거되어 마침내 웅장하면서도 맑은 소리를 내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명동은 쇠북소리로 진동을 만들어 낮은 주파수의 소리로 지옥문을 깨는 파(破)지옥(地獄)진언(眞言)이 되고 음관의 정음(淨音)작용은 어지러운 마음을 쉬게 하여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아침과 저녁의 예불에 앞서 치는 종은 그 소리만으로 가슴속에서 파도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 안게 하고 고통 받는 중생과 마음의 지옥, 인연의 지옥에 갗인 모든 중생을 건지는 염원을 모아 하늘 위와 아래, 그리고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고 수며 들게 한다.
중국과 일본의 범종도 큰 것은 당목(撞木)으로 당좌(撞座)를 때려 종이 울리는 것은 한국의 범종과 같지만 신라범종은 그 특이한 모습의 아담함과 그 청아한 소리나 날아갈듯 새겨진 문양이 웅장하고 그윽하기로는 천하에서 가히 일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신라범종은 8세기 중반에 그 원형(原型)이 완성되는데 그 당시 로마와 함께 세계제국인 당나라의 입부분이 헤벌어진 범종과는 그 모양과 소리를 서로 견줄 수 없게 그 품격이 높다고 한다. 우리 범종역사에 나오는 경주 황룡사 대종은 약 80톤으로 현존 중국의 최대 종인 40톤짜리 대종(大鐘)보다 배나 더 커서 그 아름다움은 고사하고 무게만으로도 무려 두 배에 달한다. 그 소리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에밀레종은 성덕대왕 신종이라 불러지기도 하는데 AD752년에 주조되었으며 그 무게가 20톤으로 현존하고 사용가능한 종 중, 세계 제2위의 크기이지만 수년전 일본 NHK방송에서는 현재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이 종이 세계 제일의 소리를 가졌다고 발표한바 있다. 신라 범종이 세계제일이라는 것은 현대의 주조기술로도 밀납(蠟) 거푸집을 쓰는 등 특이한 기술이 재현되지 못해 이와 버금가는 종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니 우리조상들이 지닌 소리과학의 우수함은 물론이요, 지옥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신라인들의 대자비심이 이 거대한 불사를 해냈다고 모두 감탄할 뿐이다.
세계의 모든 고등종교는 이 세상이 고통스럽다는 전제아래 그 고통의 세계를 벗어나 즐거운 세상을 얻기 위한 길을 찾아 나선다. 오늘날 물질문명의 강자인 서양의 보편적종교로 성장한 기독교는 천당이라는 유일신의 궁정을 상정하고 그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절대자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여 살다가 그가 사랑으로 불러들여 지고 그 주의 우측에 나아가기를 작정한다. 세상 적으로 지금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즉 현실이 고통으로 느껴지더라도 그것이 주인이 점지한 사랑의 계획이라고 믿게 되면 감사할 일이지 원망은 고사하고 아무런 군더더기의 기도도 감히 용납되지 않는다. 이렇게 자기가 믿는 신에게 의지하여 복과 행복을 구하는 종교인들에게는 종은 기도나 묵상시간을 함께하는 알림이 역할을 하나 마음을 청정히 하고 진리와 하나가되기 위해 참구하고 고통 받는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기를 서원하는 불자들에겐 종소리는 내면으로, 내면으로 자기를 찾아가는 동반자이기도 하다. 미황사에 들어온 후 줄 곳 북과 대종을 쳐왔다는 지묵스님은 새내기들과의 차담시간에 대북은 손 목 부분에 피가 나도록 연습을 하여도 마스터하지 못하였지만 대종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터득했단다. 대종은 당목으로 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떠난 당목이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다 당좌와 맛나면 자연히그 청아한 울음을 터트린다고-무위의 소리라고 말했다. (5 끝)

6. 산사의 진수 새벽예불

큰 종소리를 들으면서 법당에 들어서면 스님들 자리와 신도들자리가 가지런히 깔려있다. 먼저 들어온 보살이나 거사가 어제하던 대로 내림해온 방식에 따라 불문율로 정해진 자리에 좌(座)복(複)을 나란히 깔아놓는데 스님들은 정해진 자리에 좌정하지만 텤풀스테이로 온 사람들은 법당에 들어가 비어있는 편한 자리에 앉으면 되었다. 구지 템풀스테이를 원한사람들은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 말고도 다른 종교를 가졌거나 불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은데 한국 사람이거나 외국인이거나 관계없이 새벽예불에 참석해서 하는 대로 맡겨 두는 게 보통이라 한다. 절에서도 오고가는 것을 막지 않듯이 참석하고 안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지 요청하거나 눈치를 보내는 일은 전혀 없다는 게 일찍 들어와 있던 선착한 분들의 전언이다. 부지런히 들어갔는데도 벌서 스님좌석만 빈자리가 있고 보통석은 맨 뒤로 몇 개 남지 아니하여 둘이서 끝자리에 좌정했다. 주지스님이 청정수 한잔을 올리고 향을 사른 후 합장하고 묵언(黙言)도량에 처음으로 소리를 만들어 “계향 정향 혜향 해탈 향 해달지견 향”하며 예불을 시작하였다. 템풀스테이하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으로 돌아오는 것은 장엄한 종소리와 스님의 간절한 발원문인데 하도 가슴속으로 젖어오는 것이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주지이신 금강스님이 5일 새벽 내내 들려주신 발원문은 당나라 때 이산교연선사가 쓰신 것으로 보통 “이산혜연선사발원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산 혜연선사 발원문>
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법보와 보살성문스님들께
지성 귀의 하옵나니 자비하신 원력으로 굽어 살펴 주옵소서.
저희들이 참된 성품등지옵고 무명 속에 뛰어들어 나고
죽는 물결 따라 빛과 소리 물이 들고 심술궂고 욕심내어
온갖 번뇌 쌓았으며 보고 듣고 맛봄으로 한량없는 죄를 지어
잘못된길 갈팡질팡 생사고해 헤매면서 나와 남을 집착하고
그른 길만 찾아다녀 여러 생에 지은업장 크고 작은 많은 허물
삼보 전 원력 빌어 일심참회 하옵나니 부처님이 이끄시고
보살님이 살피시어 고통바다 헤어나 열반언덕 가사이다.
이 세상 명복은 길이길이 창성하고 오는 세상 불법지혜
무럭무럭 자라나서 날 때 마다 좋은 국토 밝은 스승 만나오며
바른 신심 굳게 세워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세상일에 물안 들고 청정범행 닦고 닦아
서리같이 엄한계율 털끝인들 범 하리까 점잖은 거동으로
모든 생명 사랑하여 이내목숨 버리어도 지성으로 보호 하리
삼재팔난 비껴가고 불법인연 구족하며 반야지혜 드러나고
보살마음 견고하여 제불정법 잘 배워서 대승진리 깨달은 뒤
육바라밀 행을 닦아 아승지겁 뛰어넘고 곳곳마다 좋은 설법
천겹만겹 의심 끊고 마구니를 항복받고 삼보를 뵈울 적에
시방제불 섬기는 일 잠깐인들 쉬오리까 온갖 법문 다 배워서
모두통달 하옵거든 복과지혜 함께 늘어 무량중생 제도하며
여섯 가지 신통 얻고 무생법인 이룬 뒤에 관음보살대자비로
시방법계 다니면서 보현보살 행원으로 많은 중생 건지 올제
여러 갈래 몸을 나퉈 미묘법문연설하고 지옥아귀 나쁜 곳엔
광명놓고 신통보여 내 모양을 보는이나 내 이름을 듣는이는
보리마음 모두 내어 윤회고를 벗어나되 화탕지옥 끓는 물은
감로수로 변해지고 검수도산 날센 칼날 연꽃으로 화하여서
고통 받던 저 중생들 극락세계 왕생하며 나는 새와 기는 짐승
원수 맺고 빛진이들 갖은고통 벗어나서 좋은 복락 누려지다
모진질병 돌적에는 약풀되어 치료하고 흉년드는 세상에는
쌀이되어 구제하되 여러중생 이익한일 한가진들 빼오리까.
천겁만겁 내려오던 원수거나 친한 이나 이 세상 권속들도
누구누구 할것 없이 얽히었던 애정끊고 삼계고해 벗어나서
시방세계 중생들이 모두성불 하사이다 허공끝이 있사온들
이내소원 다하리까 유정들도 무정들도 일체종지 이루어지이다
마하반야바라밀 나무석가모니불
이어지고 끊어지고 커지고 작아지며 청아하게이어가는 주지스님 염불소리가 이 세상 것 아닌 듯 달마산 정기에 쌓여 듣는 이들을 천상으로 이끌고 청정한 마음으로 하루가 시작할 것 같다.
다음호에 계속

7. 마음을 찾아나서는-행선과 좌선(템풀스테이-8-)

달마산 정기로 빚어진 밝은 물을 감로(甘露)다(茶)로 삼아 마음과 몸으로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모든 중생을 건지고,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를 끊어버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부처가 되겠습니다하는 네 가지 큰 서원을 맹서하고 법당 문을 나오니 아직도 초 여름밤은 새지 않았으니, 아마 예불은 새벽시간을 멈춰 세워 겨우 반 식경쯤만 지났나보다. 돌층계를 조심스럽게 내려서 이미 한 줄로 서서 걷는 스님들을 따라 왼손위에 오른손을 가지런히 포개 얹고 소리 없이 단전호흡하며 명상의 행진을 시작하니 이것도 참선의 한방법인 행선(行禪)이다. 어둠이 깔린 법당 앞 돌 당간의 기둥을 기준으로 아마 5이나 7번쯤 큰 마당을 돌고서는 제일먼저 비구니스님들이 처소로 가는 층계로 살아지고 그 다음 층계에서는 한참 하안거 중인 “자하루” 마루방으로 비구들마저 빠져나가니 이제는 우리들 템풀스테이구룹 만 남아서 지묵스님 뒤를 따라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참선방을 허덕허덕 올라갔다. 지묵스님이 밤새 닿진 장지문을 열어 저치는 동안 산 아래 바다가 보일듯하여 남서쪽을 바라보니 자욱한 어둠에 하늘과 땅을 어름 할 수가 없다. 스님을 가운데 두고 면벽이이니라 열린 문밖을 향해 반가부자를 틀고 앉으니 모습은 제법 참선하는 수좌 같으나 각기 모습도 다른 이들의 화두를 들은 마음자리야 짐작인들 하랴.
이러구러 또 30분쯤 앉아 있다가 그것도 앉아있었으니 몸을 풀어주는 순서의 동작을 따라하면서 기분이 풀리는 몸과 마음을 향해 여행을 끝내고도 이것만은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들은 이제 오늘 새벽예불의 모든 절차를 마치었고 6시 목탁을 치면 함께 아침이 준비된 식당으로 가서 공양을 하고 대중이 함께 청소도 하고 채소밭도 가꾸는 울력이 있으면 함께 일하고 재수 좋게 그것도 없으면 오늘 6시 저녁공양 때 까지 자유 시간을 갖게 된다. 날이 환히 밝아오기에 다시 비누세수도 하고 양말도 빨아 널고 하며 식사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를 기다렸다. 이제야 새벽에 우는 새들이 님 이 그리워 우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집에 있을 때 자유롭게 열고 닫던 냉장고 생각이 낳다. 오늘은 울력이 끝나자마자 첫차로 해남완도 쪽으로 가서 다도해 관광을 시작하리라 약속한 대로 채비를 하다가 그것이 채 끝나지도 아니했는데 아침공양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우리 둘을 향적당 한적한 방에서 몰아내듯하여 공양 간 쪽으로 바삐 발걸음을 재촉했다.
잰 걸음으로 알려준 공양 간으로 올라가니 이미 하얀 고무신들이 나란히, 나란히 줄지어 있고 두 줄로 늘어놓은 식탁에는 이미 공양을 시작하신 스님들도 있었다. 나는 옛날에 많이도 해본 사람같이 Mrs Rim의 모범이 되어 그릇두개에 죽과 반찬을 넉넉히 담아 들고 테이불로 돌아와 나란히 놓고 물그릇을 하나 더 들고 와서 장판방에 좌복을 깔고 앉았다. 김치며, 나물이며, 모든 음식이 어이 이리 맛이 있을까? 원래 스님들은 바라공양을 하시는데 똑 같이 생긴 같은 크기의 그릇 네 개에 바리보로 불리는 깨끗한 내프킨으로 수저와 저를 함께 싸서 주어진 장소에 각자 보관한다. 공양 때가 되면 각자 그걸 들고 와서 나누어 주는 순서대로 청정수를 받아 휭기고 자기 양 만큼 음식을 받아 깨끗이 다 먹은 후 마지막 그릇에 담겨있는 청정수로 음식그릇을 닦아 한 그릇에 모은다. 보통 그릇을 휭군물은 맑게 마련인데 만약 그 속에 음식찌꺼기가 있으면 물통 임자가 그것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그 물을 자기가 마시어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물을 다 모은 다음에 그 속에 찌꺼기가 보이면 큰 스님으로부터 호령을 당하거나 심하면 그 찌꺼기를 받은 사람이 자기 목구멍에 버려야 하기 때문에 큰 낭패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에게 그런 곤욕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음식찌꺼기는 손가락으로 닦아서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것이 내일을 위해서도, 도반들을 위해서도 좋고, 음식을 먹도록 준비해준 단월 분들의 고마움에도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중의 식사방법으로서 이 바리대공양보다 더 질서가 있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시간과 물질을 절약하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 이것이 부처님시대부터 한결같은 식사방법이니 참으로 놀랍고 훌륭한 제도라 감탄하게 된다.

About the Author
Edward Rim - 림 관헌, 한미 시민 연합 초대회장 역임, 공화당 The President Task Force 멤버, 시카고 중앙일보 객원 논설 위원, 대한민국 평화통일 자문위원 역임, 시카고 상록회 이사장 역임, 시카고 불타사 지도법사, 미 중서부 한미 장학회 회장 역임, 미 중서부 전통 예술인 협회 이사, 상임고문, 성균관 대학교 유학 및 동양철학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