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언론, 그리고 그 사명(2013.1.10. 림관헌 이 아침에)
우리 동포가 모여 사는 곳이면 세계 어느 곳이 든 신문이 발행되곤 하였다. 19세기 우리 동포들이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으로 이주하면서 작아도 동포사회가 형성되면 어떤 형태로든 “신문”이 나왔는데 그 내용은 동포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고국과 현지뉴스를 전달하고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창달하는데 도움이 될 교육적 계몽적 칼럼과 현지적응에 도움이 될 소식을 포함하는 문화적, 사회적, 민족적 자존을 지키는데 도움이 될 우리말 신문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 시카고에서도 1970년 초기에 등사기로 만든 시카고 한국일보가 나오고, 뒤이어 중앙, 동아, 한계례, 조선일보와 현지신문이 나왔는데 이것이 한국식품점, 식당, 학생관 교회 등 한인들이 모이는 공공장소를 중심으로 선을 보이고, 외롭고 고된 삶을 꾸려가는 동포들이 구독하기 시작함으로서 컴뮤니티의 읽을 거리로 성장하여왔으며 한인 인구가 늘고 밀집지역이 생김으로서 오늘과 같은 규모있는 언론으로 성장발전하게 되었다.
우리 해외동포언론은 한국국내언론이 그러했듯이 사회의 공기로서 공공의 언로요, 여론과 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에 자부심을 갖고 이에 관련되는 크고 꼭 알려줄 뉴스만을 골라서 품위 있고 공정한 언론으로 발전시켜왔다. 여러 가지 경제적 영세성과 광고주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선비정신과 강인한 애민정신으로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권력이나 이권에 굴복하지 않는 그런 독야청청한 절개를 자랑스러운 정통언론으로 여기며 그 자부심을 지켜왔었다. 그러던 것이 인터넷 등 새롭고 가벼운 뉴스메디어가 나오고 SNS의 그 다양한 익명성을 악용한 무책임한 대체언론이 판을 치면서 언론인들의 자세가 바뀌고 고고하고 공정하며 정의실현을 위한 불굴의 기백이 일부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본국의 모계신문의 지원감소, 현지의 파당적 편파성 등에 의한 사(社)시(示)의 굴절이 묵인되는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되었다.
동일한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기사가 소속언론사나 심지어 기사를 취재하는 기자에 따라 그 내용이 사뭇 다르거나 심지어는 기사로 다르지도 않는 언론이 나오는 등, 참으로 부끄럽기 까지 한 사태를 불러오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 비근한 예로 지난해 12월 18일, 시카고한인사회최초의 합동망년회(?)가 윌링 한인문화회관에서 개최된 것을 두고 일간지, 주간지,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매체 등 기사가 각기 큰 차이가 있었고 특히 그 참 석인원은 기자에 따라 200여명에서 800명까지 그 추계가 다른 것을 보고 참석자는 물론 독자들이 큰 혼란을 겪었을 것 같다. 왜 이럴까? 그것은 간단하게 짐작은 간다. 윌링건물구입을 둘러싸고 찬성자와 반대자로 나뉘고 그 지도자라는 사람들과 언론사 종사자들 간의 관계나 사건을 이해하는 차이로부터 빚어진 결과라고. 그러나 아무리 인간적인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공익을 먼저 생각하여야 하는 언론종사자, 전통적으로 높은 직업의식과 자부심이 강한 공인인 일선 기자의 눈으로 보는 잣대가 너무도 크게 달라서 변명이나 정당한 사유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필자를 포함하는 우리 언론 관계자들과 언론관계 컨트리뷰터들은 이런 언론사간의 보이지 않는 마찰이 언론의 공익성, 객관성, 진실성, 정통성과 품위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야 할 것이며 독자들로부터 신뢰감을 추락시킬 수도 있다는 겸손한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선 기자, 편집자, 칼럼니스트 등 우리들 언론관계자들과 컨드리뷰터들은 진실과 공익성에 입각하여 사실관계를 기사화하고 비판하며 선양하여야 하고, 조금도 사심이나 개인적 감정이 스며드는 기사를 써서는 안 되는 것이 기본이며, 바로 그런 기자정신 때문에 사회의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는 것에 자존과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언론인도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인간이며 감정의 동물이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언론인의 금도를 지킬 때에만 자유언론인으로서 존경받을 자격이 있으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고 법적, 사회적 책임도 따르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론인은 1일 3성(省)이 아니라 기사를 쓸 때 마다 그 이상의 자기성찰(自己省察)을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