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주년 6 25기념일이 다가와(2014.6.12. 림관헌 이아침에 칼럼-1)
매년 이맘때만 되면, 눈을 뜨고서도 6 25, 그 험난한 시절이 야외극장의 한 장면같이 눈앞을 달려 지나가듯, 오늘 날, 확 달라진 현실에 겹쳐 어제일 같이 서언하기만 하다. 태평양전쟁에 져가던 일제가 허둥대며 수탈하는 동안, 우리에게 가까이 닥아 온 미국에 대한 기대, 영용한 우리 독립투사들의 귀향에 대한 열광, 이런 불분명한 불안 속에서 갑자기 찾아온 해방-그 기쁨과 그 광난, 18세기 가난 그대로이던 민족해방(解放)의 축제는 잠깐 만에 지나고, 낫 설기만 하던 38선은 악몽 같이 자꾸만 긁고, 높게만 자라고 있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우리들은 일본어 책을 국어책으로 바꾸어 등에 얼 메고 <먼동이 튼다, 두 눈을 뜨라. 우리는 뒷날 조선에 피는 어린이 꽃, 가슴에 가득 희망을 안고 소담한 송이 피어내자.>며 대한의 어린이로 잘 자라고 있었다. 머지 안아 백발을 날리며 왜병을 혼비백산케 했고 이제는 개선장군이 되어 곧 돌아오리라 믿었던 김일성장군은 영영 돌아오지 않고, 애송이 소련군장교, 김일성(김성주)이 평양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무슨 동화책 속의 소문같이 들려왔었다. 이렇게 무어가 무언지 모르는 사이, 거짓과 폭력, 탐욕과 협잡이 엉클어진 가운데 남과 북은 갈리고 민족의 심장은 터져서 죽음과 분노의 세월이 싸늘하게 얼음과 같은 견고한 철책으로 굳어져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과 <동해물과 백두산이->이, 순백하던 3천만 민족을 자기도 모르게 붉게, 파랗게 그리고 노-란 빛 색깔로 물들이며, 불신의 장벽으로, 세계의 냉전을 혼자 감당하듯 무거운 짐을 진체 광야에 내쳐졌다. 그것은 2차 대전 후, 세계질서와 세력균형재편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의지나 희망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연합국에 뒤늦게 뛰어든 스탈린(러시아-소비에트연방)의 탐욕스럽고 음흉한 세계 공산화정책의 한 끝자락으로 한반도가 놓여 있었고 미 소 양국의 손에 놀아나게 되었다.
러시아는 1917년, 제정몰락을 주도한 빈민, 노동자계급의 폭력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공산당이, 경제적 자본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로 가던 유럽의 세속주의 국가들이 해결하지 못한 새로운 경제적평등과 정치적 민주주의체제를 내 새워, 자본가와 귀족의 지배가 아니라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와 그 조합(Union)인 공산당의 지배체제로 <평등사회>를 구현한다며, 1922년 러시아아가 중심이 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USSR)를 창설하였었다. 소련은 그 후 지독한 1인 독재와 세계 공산화를 향하여, 1991년 해체될 때까지 70년을 세계 양대 제국(정치적 중심국)의 한 축(一軸)으로 버티었었다. 인류역사에는 거대한 제국이 나타나서 평화스런 세상(平天下)을 만들겠다고 노력하지만 결국 그 거대한 힘을 갖는 제국은 인간의 자유를 제압하거나 새로운 도전에 의하여 붕괴되는 역사를 반복했듯이 세계노동자계급독재를 부르짖던 국제공산당이 지배하는 제국의 건설은 러시아와 그 주변 위성국(衛星國)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체제 내재의 병폐로 인하여 스스로 멸망하고, 그 체제의 핵심인 계급독재와 국가계획경제체제원칙을 스스로 포기하게 하였다. 그래서 소련은 해체되고 보동국가 되었지만, 위성국 중, 북한과 쿠바만이 아직도 사회주의계획경제체제를 버리지 못하고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시장경제체제로 바뀌고, 6.25전쟁 중, 맹방인 중국정부와 러시아가 대한민국과 외교관계, 경제협력관계를 증대하는 지금에도, 남북대립각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사회주의(공산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은 이미 실패한 공산주의체제를 버리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소련의 구외교문서로 증명된 김일성의 남침을 아직도 미제와 남한의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날조된 계급 독재가 아닌 김일성일가의 <유일적 존엄에 의한 세습독재>를 신앙처럼 받들이고 있는 북한의 현실이다. 인간은 현재보다 조금 더 잘살아보려고, 자본이나 권력으로부터 좀 더 자유스러워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고금(古今)과 동서(東西)가 다르지 않았고, 시장경제 또는 자분주의나, 공산주의나 계급독재를 추구하였던 것이 모두 여기에 기인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지금보다, 또는 남보다 저 자유스럽게 되기 위하여 돈을 더 많이 벌려고 노력하고, 더 자유로워지려고 신에 매달리고, 공산당에 가입하며 권력자에 충성을 다한다. 그러나 역사나 논리는 결국 공산주의라는, 명목상의 계급독재로는 잘 사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증명하지 않았는가?( 2에 계속)
64주년 6.25기념식에 부쳐(2014.6.12. 림관헌 이아침에 칼럼-2)
(1에 계속)
레닌-스탈린-고르바초프에 이르는 70년간의 마르크스주의 실제(實際)실험은 공산주의경제체제국가경영이 20 세기 초, 자본주의와 초기 자유시장의 위험성을 치유할 이상적 사회로 가는 길이라는 신념과는 달리, 모든 시민들이 더 가난해지고 더 부자유스런 독선과 독제체제로 되었고, 그래서 더는 견디지 못 할 잘못된 제도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뒤서거니 앞서거니 러시아와 이웃하였거나 중화인민공화국과 연장선상에 있던 소련의 공산주의 위성국들은 스스로 공산주의를 버리고 경제적 시장주의와 불완전하지만 명목적인 계급독제가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를 채택하였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자유+민주+시장)로 이념적 동서분단국가였던 독일은 소위 평화적 흡수통일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흡수통일 되었고, 오랫동안 남북 간 이념전쟁에 휩 쌓였던 베트남이 공산정권인 월맹의 남북통일전쟁에 승리함으로서 공산체제-무력통일을 이룩한 후, 이제는 시장경제체제로 재탄생하였다. 우리 한반도에서는 미-소의 군사적 분계선(分界線)인 북위38도 선을 미, 소군관구로 분할 관리하면서, 연합국이 약속한 한 반도의 독립정부 수립 이전에 미, 영 ,소, 중국 4강의 신탁통치(식민통치)를 하려는 3상회(미,영,소 외무상)의 합의를 둘러싸고, 즉각 독립을 주장하는 남한동포와 국제공산당의 맹주인 스탈린의 지시를 받았던 남(남로당)과 북조선공산당이 반탁을 버리고 찬탁(贊託)투쟁을 함으로서 남북 분단의 단초를 만들었고 결국 남북한의 분단정부를 탄생시켰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 차고 일어 나거라…
산 너머 바다건너 태평양 건너
아 -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희망에 찬 우리 동포들이 부르던 이 해방의 노래도 1945년12월16일-26일 사이에 열린 모스코바 3상(三相)회의 합의로 5년간 신탁통치<안>이 발표되면서 어두운 밤이 길어지는 것을 반대하고 즉각 독립을 원하는 임시정부(臨時政府)를 비롯한 좌우 정당 사회단체 모두가 치열한 반대 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었다. 당초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돕고,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창조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 조선인민의 민족문화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을 취할 임시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 하기 위하여 그”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남조선 미 관구, 북조선 소련 관구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를“설치하고,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창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런 합의는 결국 각 사회단체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고 폭력적 시위까지 벌어진 반탁운동의 결과 <”식민정치를 청산하고 유엔 감시 하에,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나마 총선거를 실시하고 헌법과 정부수뇌를 선출한다.>는 유엔 결의에 따라, 1948..8.15. 드디어 우리 헌법 전문에서 보듯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기미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계승하여> 대한민국을 건립한다고 하며, 한반도내 유일한 합법정부가 UN결의로 대한민국이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미군관구 내(남한)에 대한민국이 탄생하자 곧 이어 9월에 소련 관구는 기왕에 설치한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조선민주인민공화국을 창설하여 정부수반에 김일성이 취임하여, 남북은 공산국가와 민주구가로 분립, 냉전의 최전방의 하나가 되었다. 1950년 김일성의 통일해방전쟁(6.25사변)과 64년간의 대립을 거치는 동안 경제규모나, 민주화의 척도, 국민복지면에서 남한은 수십-수 백 배에 달하는 경제와 민생의 격차를 보이며, 역사상 그 국격(國格)과 국부가 현저한 차이를 보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인민의공화국의 현실을 두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체제의 우월을 증명하는 실례(實例)로 삼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 참전 16개국은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한국의 발전을 보면서 한국을 지킨 것을 크게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3에 계속)
64주년 6 25기념식에 부쳐(2014.6.12. 림관헌 이아침에 칼럼-3)
(2에서 계속)
오늘날 북한의 끊임없는 선전, 선동, 그리고 남한의 좌파 특히 전국교원노동조합(전교조)소속 교사 들이 남북분단의 역사를 종북(從北)논리로 왜곡하고, “선생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사실과 다르게 교수함으로서 진실과 다른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주고 있어 많은 국민이 민족의 발전과 통일에 크게 장애가 된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 역사는 사실(史實)에 입각하고 합리적인 논리와 설명을 통해 진실을 심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60여 년간 앵무새처럼 “미 제국주의와 그 괴뢰-남한의 북침” 또는 “압살”시도로 “북한이 못살게 됐다“고 주장하고, 그것이 사실인양 학생들에게 심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북한의 왜곡된 역사관을 따라하는(종북)>-소수 전교조 소속교사들이 우리교육을 붉게 망치고 있다는 것은 비단 오늘과 어제일이 아니지만 그 결과는 근년에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젊은이들의 한국사인식이 각종 설문조사와 그 투표성향에서 잘 나타나고, 남북관계에 까지 쿤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는 2014년 6월 지방선거에서 새로 선출된 12명의 교육감 중 10명이 소위 진보교육감이라는 사실로 나타났으며, 이들 좌파교육감들은 자신들의 정치이념인 진보 내지 좌파, 친북내지 종북이라는 근본문제는 들어내지 않고, 현실에 나타난 교육의 고질적문제점만을 개혁하겠다는 것만 내세워, 학부모들이 개혁을 지지함으로서 당선되고, 그리곤 그 상위실세인 이념적 정치인들의지지 속에 소위 ”진보교육감 단합모임“을 역고 업무공조를 다짐하였다.
대부분의 학부모와 국민들은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자녀들의 교육과 성장에 큰 몫을 하고 장래에 절대적 영향을 주는 선생님들과 교육감 말에 정성을 기울인다. 그럼으로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올바른 교육에 전념하고 자기의 정치적 신념이나 사회적 갈등에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전교조는 이념논쟁의 중심에 서 있으며, 정치가나 정당은 그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 식자들의 생각이다. 전교조의 종북논리(북한 따라하기)로 6.25왜곡, 건국(建國)사를 비롯한 ”북 이론 따라 하기“에 놀란 많은 학부모들이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었으나 전교조가 조직이 진보정당에 동화하고, 정치투쟁을 강화하면서 2010년 소위 1기 진보교육감 6명이, 2014년 지방보궐선거에서는 12석 중 10석을 추가함으로서 17광역단체 중 13개 지역을 석권하는 불상사가 일어 낳다. 이것은 전교조가 불법노조임에도 불구하고(2014.6.19.법원판결) 국민들에게는 당면교육개혁을 전면에 내세워 내심 진보 내지 종북이념을 감추면서 보수를 사랑하는 진보(인천교육감 당선자), 선생님들을 받드는(경기교육감) 등 애매하고 그럴듯한 선거운동을 전개하여 교육계의 부조리혁신을 바라는 학부모들의 마음을 빼앗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이들은 학사(學事)-교육행정을 통해 올바른 한국사를 현장교육-대안교육이라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으로 붉게 물들이려 할 것이며, 노무현진보정부에서 평통수석부의장, 통일부장관직을 역임하면서 좌파정부의 사상적 지도에 앞장 썼던 이 모 경기도 당선자의 지역중심 대안(代案)교육-교육복안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듯이 교육계의 좌경화가 불보 듯하다. 그는 아마도 노무현정부가 통일에 실패한 국가경영을 진보교육의 부족으로 보고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꿈꾸며 수석부의장의 높은 자리에서 지방교육감의 낮은 자리로 내려왔는지도 모른다. 6.25발발 후, 붉은 완장을 두른 지방 빨갱이들이 반동이라며 많은 국민을 위협, 살상한 역사를 잊는 다면 이제 4년 후 또다시 표를 더 모아 100%진보교육감 시대를 만들 것이고, 교육현장은 종북의 터전이 될 것이다.
필자는 6.25로 해방구가 된 고향에서 지방빨갱이들에게 잡힌 친구의 아버지(부면장), 내 외6춘(국방경비대 병사) 등 200여명이 인민재판도 없이 건초로 채워진 충남서천농업창고에서 불태워 진 후, 돌아온 시신의 장례에 참석하여 두려워 떨던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1년 반 동안 펼쳐진 해방구에서의 빨갱이가 저지른 생생한 반인륜적 만행은 추념도, 비난도 못하고, 공비나 그 협력자들의 피해는 민주투쟁으로 미화되는 되는 <종북교육>, 이제는 그 왜곡된 역사교육현장을 되돌려 놓아야 할 때이며, 자유 없는 북한, 국민이 못사는 이유가 공산주의-유일체제에 있음을 교육하는 그런 시대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국가와 민족의 백년대게의 초석인 교육을 이런 반(反)대한민국 정부-그 역사를 왜곡하는 극렬 전교조지도부에 맡긴다는 것은 지금 한국에서 일고 있는 부자간, 세대 간, 지역 간 불통(不通)과 대립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4에 계속)
64주년 6 25기념식에 부쳐(2014.6.19. 림관헌 이아침에 칼럼-4)
(3에서 계속)
위에서 본바와 같이 6.25. 64주년을 맞는 지금 일부종복이론(북한 따라 하기) 교사들에게서 배우는 학생들은 굶주림과 유일체제의 억압 속에서 신음하는 북한 동포들의 실상을 전혀 알려하지 않고, 김일성이 공산통일 전쟁을 일으킨 6.25의 진실한 역사도 모르고, 통일에 대한 희망, 통일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함으로 부모나 선배들과 그 사고의 밑바탕이 괴리되고 있음은 두렵고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구체적으로 몇 가지 저들의 왜곡된 역사, 사회, 윤리교육내용의 예를 들어보자.
#1. <6.25는 이승만의 북침이다.>라는 주장-구 러시아의 외교문서와 우리들의 체험(體驗)으로, 북한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의 합의로 남한공산화-통일-해방전쟁인 6.25가 터졌다는 것이 증명되었는데도 저들은 미제의 지시를 받은 이승만의 북침(北侵)이라고 주장한다. 김일성은 한 달 안에 남한해방을 완료할 계획으로 일요일 새벽 선제-기습공격하여 국방경비대(남한군)를 제압하고, 그들 말대로 이승만 도당을 거의 바다 속에 몰아넣었다. 미국은 세계 공산화전략을 억제하는 냉전체제를 구축하며, 1950년1월12일 애치슨라인(Acheson line)을 선언하여, 동아시아 방위선은 국공내전에 패배한 장개석의 대만과 중, 소와 전선을 같이하는 남한을 국제공산주의 방어선박으로 밀어냈다는 오해를 불러왔었다.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은 애치슨 선언으로 대만과 남한해방전쟁에 미국의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을 것이며, 이런 외부조건으로 김일성의 야망이 소련과 모택동의 동의로 속전속결의 승리에 자신감에 차있었다. 개성과 옹진반도의 국지(局地)도발에도 힘겨워하던 남한의 국군이 만반의 준비와 막강한 군사력으로 기습공격 하는 인민군에게 붕괴되었고, 그 진격 뒤에서 남한의 공산주의 뿌락지들은 일사불란한 점령지접수와 치밀한 해방지역(해방구)공산화에 성공한 사실을 보면, 그들이 주장한 북침은 거짓이요 그 가능성은 -0%-일 수박에 없다.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중공)이 중화민국(국민당장부)을 대만으로 몰아내는데 선봉부대로 활약했던 조선인 8로군 소속을 입북(入北)시켜, 개편한 북한군6사단 등, 인민군은 한 달 만에 남한의 전국토를 대부분 유린하였고, 이에 놀란 UN이 1950.7.7. 전쟁발발 2주 내에 UN군 깃발아래 낙동강방어전선에서 제대로 전투를 치룰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다. 북침사실(史實)은 1949.9.30. 외신기자회견에서 이승만대통령이(그것이 민심을 다독이려는 국내용-정치적 발언이긴 했겠지만) 우리가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덩달아 육군참모총장은 아침은 개성에서 저녁은 평양에서, 5일이면 통일이 가능하다는 발언을 하여, 미국은 남한의 자체방위능력을 축소하는 정책을 펴게 되었고, 또 이 헛된 호기(豪氣)의 말은 북한에 의해 6.25는 북침이다. 라고 왜곡시켜왔다. 다행히 당시 유엔주재대한민국대표였던 장면(전부통령)씨의 신속하고 지혜로운 활동으로, 그 당시, 심지어 <미국정부는 태평양상의 사모아군도 한 섬에 새 한국을 건설한다는 아이디어 까지 냈고, 이승만은 일본에 망명정부를 세우는 방안까지 고려했었던> 급박했던 사태를 구하고, 6.25와 전혀 관계없다는 소련의 UN대표 앞에 노획한 1950.소련제소총을 증거로 제시하며 소련이 북한군을 원조하고 있다는 공동 남침 설을 증명하였었다.
옵서버 자격의 장면대사는 미국과 긴밀한 협조로, 6월25일 같은 날(14시간 시차)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군은 38도선 이북으로 철수 할 것, 회원국은 북한을 원조하지 말 것을 결의하도록 이끌었으며, 27일에는 미군의 참전, 안보리의 한국지원결의를 얻어내고, 실로 2주일이 되는 7월 7일, 사상 최초의 UN깃발아래 유엔군이 북한군을 방어하는 기적 같은 일을 일구어냈었다.
#2. <남북분단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정부 책임이다>라는 주장-대한민국(남한)이 조선민주의인공화국(인공)보다 25일 앞선 48.8.15. 건국을 선포하였으니 남한에 분단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일리가 있는 듯이 보였었다. 하지만 가능한 지역에서의 자유투표로 독립국가를 세우도록 한 UN결의가 있기 전에, 소련군관구 안에 이미 조선인민위원회라는 정부조직을 세웠음을 알아야 한다(다음 5에 계속)
64주년 6 25기념식에 부쳐(2014.7..2. 림관헌 이아침에 칼럼-5)
(4에서 계속)
북한과 종북주의자들(이념적 좌파여부와는 관계없이 무조건 북한주장을 따르는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한 결 같이 남북분단의 책임은 미국과 그 괴뢰인 남한에 있다며 이미 역사적으로 김일성의 남침사실이 공개된 외교문서로 증명 된 지금에도 이승만의 북침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1945.8.15. 일본항복직후, 미, 소 양국이 38선을 기준으로 서둘러 진주하고, 9월 초에는 남쪽에 미군관구, 북쪽에는 소련관구를 설치하고, 그 사령관인 맥아더와 로마노프가 우리민족의 염원과는 거리가 먼, 군정을 시작하였음으로 이들 연합국의 분단책임이 동등하다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미국은 소련과 같이 영토적 야망이나 세력균형을 위해서가 아니라 2차 대전 중 한국에 약속한 약속한 조선독립을 원활하게 하려는 단기적 목적이라는 것은 종전직후인 9월 초부터 미-소 양국이 취한 군정의 상황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스탈린은 38선 이북을 실효 있게 공산화하여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는데 총력을 기우린 반면, 미국은 조선에 관한한 일본으로부터 해방, 통일독립 국가를 건설하도록 도아야 한다는 각종연합국선언의 성실한 실천과 이행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맥아더사령부는 포고문1호에서 여운영의 건국준비위원회와 그 산하 인민위원회, 그리고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물론, 김일성의 인민위원회도 이들 활동을 부인 금지하고, 이들 한국인에 의한 하나의 한국을 건설하도록 합의하기를 촉구했었다. 그러나 소련관구에서는 점령지인 북조선에 5도행정부(45.1.8.)와 임시인민위원회(46.2.16.)를 연달아 설치하여 김일성공산체제를 공고히 하고 UN의 조선통일국가건설노력을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거부하도록 조선공산당(남 북 노동당)에게 지시했다. 47.11.14. 유엔이 제시한 남북 전 지역에서의 자유총선 결의와 48.2.7. 이를 수행하기 위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소련군의 지시에 따라, 이들 위원단의 38선 통과를 거부하고 남로당은 총체적이고 조직적인 거부운동(서명, 시위 등 2.7투쟁)과 무자비한 무장투쟁(일부 양민까지 학살된 제주 4.3폭동 등)까지 하면서 자유총선에 의한 통일국가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가능한 지역(남한)만의 총선결과에 따라 그해 8.15. 대한민국이 탄생하였으며 같은 해 9.9일 인공(人共)을 세워 남북대결의 시대가 열리는바 이는 누가 보아도 그 분단의 책임은 소련과 김일성에게 있음이 명백하지 않은가?
#3 <천인공노 할 동족상잔(民族相殘)의>의 역사적 책임이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주장- 인류역사상 3년1개월의 6.25(한국전쟁)은 형제 부모와 동족간의 잔인했던 피와 눈물, 죽음과 파멸, 형용할 수 없었던 민족의 고통과 국토의 파괴는 형언(形言)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64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피 속에 응혈(凝血)로 남아있다. 이는 민간인 사상자 250만(피 학살남한인구 30만-140만)및 군인사상, 실종자160만(남 80만, 유엔군 54만 북83만, 중공 97만)의 인명피해와 50%이상의 산업시설 파괴, 1천만 이산가족(전쟁고아, 미망인, 이산가족)이 발생한 미증유의 민족적 비극이요 인류의 재앙이었다. 이 전쟁은 김일성이 그 1차적 책임자요, 스탈인과 모택동이 동조자였던 역사적 자료가 최근에 외교문서공개로 만천하에 알려졌고, 특히 납북과 학살로 인한 피해는 전쟁범죄의 희생임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그 주장을 추종하는 종북세력들은 아직도 6.25를 <“미국과 리승만괴뢰도당이 이 땅에 침략전쟁의 불을 지른 때로부터 64년이 되었다. 청소한 우리 공화국을 요람기에 압살하고 세계제패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미제가 도발한 지난 조선전쟁은 조선민족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하고 조선반도를 초토화한 가장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전쟁이었다.-1950년 6월 25일 리승만역도를 사촉하여 창조와 건설의 돋음으로 약동하고 인민들의 행복한 웃음소리 넘치던 우리 공화국을 불의에 침공한 미제는 우리 인민들을 가장 잔인한 수단과 방법으로 무참히 학살하고 이 땅을 폐허로 만들었다.”(2014.6.25.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대변인 담화>다고 억지 거짓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김일성-김정은 일당은 북녘동포가 그렇게 아는 것이 그들 정권의 살길이라 끝까지 거짓으로 일관한다 해도, 남한에서 젊은이를 가르치는 전교조 선생들이 학문의 도량에서 거짓을 일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6에 계속)
64주년 6 25기념식에 부쳐(2014.7..5. 림관헌 이아침에 칼럼-6)
(5에서 계속)
#4 <3개월간의 남조선해방구에서 보인 김일성의 학정(虐政)에 대한 논의>에 대하여-조선인민공화국정부는 그들이 사전에 계획한대로 개전1개월도 안되어 포항, 대구, 부산을 제외한 남한의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고 그들이 말하는 해방된 남한(해방구)을 무법, 무자비하게 3년 간 통치하였다. 그들은 미처 피난을 못한 남한국민을 공포와 포악질로 일제(日帝)의 폭정과 수탈을 수십, 수백 배 능가하는 잔악한 전범자 같은 일들을 수없이 저질렀다. 겨우 최저인간생활을 유지하던 자작농이나 문맹(文盲)을 겨우 깨친 사람들 까지 부르주아라-반동이라 몰아 부치고, 소방원, 집배원, 교사, 국방군출신, 대한청년단원 같이 말단기관종사까지도 <반동(反動)>으로 몰아, 인민재판이나 직결심판 등 정당한 사법절차 없이 처형하여,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30만 내지 140만을 넘는 동족을 납치-살해하였으며, 보도연맹 등 남로당원, 반정부분자로 처벌이나 혐의를 받았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개인적인 원한까지도 이웃을 반동으로 내몰아 복수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공포정치 말고도 농토와 가옥을 몰수하고 벼 낱알을 세어 수확량을 자의(恣意)추산(推算)하며, 소농의 토지까지도 탈취, 무상분배 하는 등 그 폭정은 공산주의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노출케 하였으며, 전시노력동원과 식량부족으로 생존을 위협받아야 했다. 다 잘살게 한다는 공산주의의 이상정치가 공산당만 잘사는 나라, 공포와 권력이 난무하는 무정부상태가 계속되면서 국민들은 속으로 대한민국의 수복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였다.
길게는 3개월간의 북괴점령기가 지나고 수복(收復)이 되면서 남한 전 지역의 거의 모든 국민이 반공으로 뭉치고 피난민들을 서두로 모든 국민이 북진통일을 외치게 되었다. 이상에서 본 6.25 한국전쟁에 대한 고찰은 기록과 연구결과 그리고 우리체험을 통하여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김씨 3대에 걸친 북조선 당국은 물론 진보당, 민주노총, 전교조 등 종북주의자들의 선전, 선동과 교육현장에서는 편파적, 이념적, 거짓역사교육을 강화하여 왔다, 그 결과로 지난 6.4선거에서 35세 이하의 70%가 좌파교육감에게 투표함으로서 17명 중 13명이 진보교육감기치아래 단결을 과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망국적 현상은 지금도 북한 핵위협 속에 전전긍긍하면서도 종북이론에 사로잡인 불법노조판결을 받은 전교조, 당 해체에 직면한 이석기 이정희 등 진보정당지도부와 그 추종자 들은 대한민국과 자기들이 안주(安住)하는 제도를 부정하며 이를 전복시켜, 북한식 통일을 추구하는 기괴한 현실은 가히 망국적이다. 이들은 북한의 선전, 선동과 북한주민의 불행한 삶과 그들의 이념적 목표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내세우지 않고, 심지어 노무현 정부의 평통수석과 통일부장관으로 친북좌파활동을 모두 들어내지 않은 채, 학부형들이 바라는 교육개혁방안 등만 내 세워 득표를 획책한 것이 모두 성공하였다. 그들의 선거 전략성공으로 머지않아 학부형들도 크게 후회할 것이고, 대한민국의 앞날은 더욱 캄캄해질 것이다. 이들 진보교육감들의 지도로 5년 후에는 전교조에서 키워낸 더 많은 새내기 투표권자들에 의하여 교육계는 더욱더 붉어질 것이 불 보듯 하다. (끝)
64년 전인 6.25전에도 한반도에서 38선 이북까지 자유 투표를 했다면 공산당이 승리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쓰타린이 유엔에 대해 불신과 오판을 거듭하여 자유선거를 위한 UN위원단의 입북을 거부케 하고 6.25남침직후, UN상임이사회에 불참함으로서 UN군의 참전을 가능케 하고, 풍전등화와 같던 대한민국의 생존이 가능했었다. 1980년대와 함께 세계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파탄으로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함으로서 공산주의환상은 살아졌고 한국은 시장경제-자유주의의 성공사례로, 인공은 계획경제-계급독제의 실패사례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전국교원노동조합(전교조)을 필두로 대한민국 안에 종북주의자들이 들끓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지식인은 이성을 찾고 생활인은 현실에 눈을 떠, 다시는 6.25의 역사를 반복해서도 안 되고, 역사를 왜곡해서도 안 될 일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