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떻게 사는 것이 선한 것일까? (1) 대동(大同)사회(2015.9.9.)
사람은 어떻게 사는 것이 선한 것일까?
(1) 대동(大同)사회(2015.9.9. 림관헌 이 아침에 칼럼)
2015년 9월5일, 굿모닝 아메리카방송프로그램(ABC)에서 조지아 아트랜타 근교에 거주하는 젊은 여인(a young woman)이 경찰로부터 속도위반티켓을 받고, 그 경찰관에게 “Thank you” NOTE를 건넸다는 뉴스를 보도해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필자가 45년 전 미국에 와서 정신없이 미국이라는 생경한 나라에서 삶을 배우며, 견문을 쌓고 있을 때만해도 경찰은 권위를 가지고 법을 집행하고 또한 당연히 자상하게 도움을 주는 이웃의 친근한 아저씨 같았지 인종차별자로 비난받지는 않았다. 시민들은 어쩌다 정복을 입은 경찰관이 서비스업종의 가게에 들리면 정중하게 대하고 커피를 대접하거나 도와주려고 했다. 순경이 자기가게 근방에 가끔 나타난다는 것은 범죄예방에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였었다. 그런가하면 가장 성가신 일을 시민이 안면도 없는 지나가는 경찰관에게 스스럼 없이 부탁하면, 그 경찰들은 하나같이 성의를 다해 해결해준다. 그때만 해도 미국사람들은 웬만한 작은 자동차고장쯤이야 상식이 된 솜씨로 척척 해결 할 수 있을 때이고 가벼운 긴급정비용 공구는 자동차안에 비치하고 다녔었다. 우리 같이 다 성인(成人)이 되어 미국에 와서 겨우 운전면허를 받고 주행이나 할 줄 아는 초(初)내기들과는 다르기도 너무 달라서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열쇄 넣고 잠겨 진 문을 여는 데는 가스 스테이션에 가는 것보다 지나가는 순경아저씨를 붙드는 게 백번 낳았다. 순경은 가장 일선에 있는 국가권력의 집행자이며 그야말로 납세자인 시민의 공복(公僕)이었다. 이와 같이 250년 전 아담스미스가 주창한 국가권력의 무위(無爲)=<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작은 정부가 최선의 정부>라는 입장, 그것이 잘 지켜질 때까지는 2500년 전 공자가 주창한 대동(大同)사회가 현실로 다가오지 않은 것인가 은근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20세기가 끝나는 무렵, 국제공산주의체제의 붕괴로 레건 대통령과 많은 미 국민들은 자본주의가 가장 훌륭한 경제체제로 입증되었다고 믿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집단적 욕심이 독점(獨占)으로 경쟁을 짓누루고 그것들이 독소(毒素)로 자라 시장경제에 먹구름을 일으키자 공자의 대동사회에서 전제로 내세운 혈구(絜矩)지도가 문어지게 되면서 평화를 사랑하는 누구도 싫어하는 폭력이 난무하게 되고, 나만의 자유가 국가권력에 도전하고, 신뢰와 감사가 살아지게 되었다. 공자(BC551-479)는 내가 싫어하는 일을 앞뒤의 사람과 좌우와 상하의 사람들에게 시키지 않는-그런 혈구지도가 자기 어버이만 어버이로 알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아는 그런 패권적 지도자들로 인해서 만민이 행복한 평천하(平天下)의 시대가 살아졌다고 하였는데, 지금부터 260여년에 활동하던 재리(財利)에 밝았던 철학자 아담스미스(1723-1790)도 욕심과 영리추구를 <보이지 않는 손>을 방치할수 없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크게 늘어나면 잘살고 행복한 사회를 이룰 수 없다>고 경고하한 것이 현실로 되었다.(No society can surely be flourishing and happy, of which the far greater part of the members are poor and miserable). 그리고 지금 미국을 비롯한 아담스미스를 추종한 나라들은 영리추구만을 내세워 손톱 위에 흙과 같은 소수의 부자, 그리고 권력이나 노동독점으로 잘사는 귀족과 그 반대편에서 못사는 땅위의 흙과 같은 대중(大衆)으로 나뉘어, 보이는 폭력과 보이지 않는 폭력이 난무하는 난(亂)천하가 되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는 사람으로 태어나 잘사는 이는 손톱위에 흙과 같이 작고 못사는 사람은 대지 위에 흙과 같이 많다고는 자연법을 설법하였다.
오늘의 혼란을 <문화충돌>이라고 부르지만 문화가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욕심이 불러온 재앙이며 석가(624?-544)와 노자(BC571?-)의 무위(無爲)나 공자나 예수의 유위(有爲)=최선을 다하는 대동사회의 꿈도 다시 탐구하며 평천하를 논의할 때가 된 것이아닐까?. 동양에서는 국가권력은 밝고 변하지 않는 하늘<天道=明明>을 대신하여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며, 두 사람이상이 모인 지역사회에서는 시시각각으로 새롭게 변하는 환경을 따라<地德=新>변하며 서로 거스르지 않고 , 각자 사람마다 혈구(絜矩)지도를 잘 지켜 인간이 지켜야 할 착한도리<人倫=止 至善>을 다해야 한다고 홍익인간(弘益人間)하고 평천하(平天下)하는 길을 제시해 왔었다. 진리에 맏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 자유와 평화가 가둑한 그런 세상, 무위로 영원한 마음을 다스리고 유한한 삶에는 최선(最善)을 다하는 생활을 하는 그런 착한길이 있는 것인까? 평천하=천하에 평화가, 사람에겐 자유가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그 출발은 사람들이 범사에 감사하는데서 일 것이고 조지아의 여인이 티켓을 줘 기분잡치게한 순경에게도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 그런 인간성 회복의 발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