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불 – 알고 싶어 할 게 없어
제가 법사라는 타이틀 가지고 불타사에서 정기 주말법회에서 주지스님을 대신해서 설법을 맡기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오늘은 주지스님도 안계시니 우리끼리 주위 이야기도하고 사는 이야기도하면서 주어진 40분을 소화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법우님들께서는 복이 많으셔서 일요일마다 절에 나오시고 스님의 법문을 참구하면서 다른 이웃의 사는 이야기도 듣고 함께 공부도 하며 부처되는 길을 부지런히 닦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미국에 왔기 때문에 승산스님 같은 성인을 모시고 징검다리 건너듯 이렇게 머리가 희도록 희희낙락하며 아이같이 껑충 껑충 대강 대강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온 우리는 넓은 세상구경도 하고 집에 가면 외딴 섬에 가친 듯, 절간에 온 듯, 진여자성을 성찰하며 부처님 가운데자리에 안자있는 듯 가섭존자의 미소 같은 얼굴을 할 때도 있게되었습니다. 우리는 법회가 끝나가면 붕생무변 서원도—하고 4홍서언을 하는데 이에 마추어진 자성중생서원도로 시작하는 자성4홍선원은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즙니다. 자성이야기가 나왔으니 “자성을 보았으면 부처다”라는 뜻을 여러분 알고 계시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홍성스님이 불타사주지로 계실 때도 절에는 자주올 수 없었는데 하루는 홍선스님의 설법 중에 “나는 부처다”하고 복창(復唱)하라는 바람에 어찌할거나 잠시 망설였던 기억이 남니다. 여러 법석동참자들은 서숨없이 “나는 부처다” 라고 외치는 것을보고 정말 저분들이 저 소리를 소화했을까 생각했었습니다. 본래 부처아닌 것이 없으니 모든 중생이 나는 부처라고 외치지 않는다해도 부처요 나만 부처라고 우긴다면 범부인 것을 모를 사람이 있겠읍니까? 저는 그때 그 장면이 대단히 흥미롭게 느껴젔읍니다. 여러분 중에 그 때를 기억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때 만약 여기계신 원거사(사다함)가 그곳에 계셨더라면 그 때도 몇 해 전까지 제게 대들듯이 “내가 무슨 부처여?”하며 묻고 따졌을 것인데 그런 일 없이 법회를 마친걸 보면 그날 그 자리에 원사다함은 없었던 듯합니다. 어때요? 그렇지요? 그래 지금은 어떠신가요? 지금은 스님이 복창하라는 말도 안했는데 “내가 부처다” 소리칠 것인가요? 우리는 법회가 끝날 때 마다 자성서원을 하는데 ”자성불도서원성“으로 맺습니다. 자성 불을 이룬 사람은 알고자 할 게 없다니까 제게 시시비비하며 질문-질문도 아닌 질문을 하며 물고 늘어질 때는 지금과는 달리 자성이라는 것도 오락가락할 때가 아니 엇나 생각됩니다. 자성-본성-본심-진여-진리-도-본체, 이런 말들은 우리 불교집안 이야기일 뿐 아니라 인류보편의 철학명제요 그럴듯한 답을 준비하고 아는 체할 수 있는 명제들입니다. 이 본심에 대하여 가장 오래전에 나온 경전은 천부경(天符經)이 있는데 이는 6천년전 동북아시아 상고사에 나오는 한웅천왕에서 기원합니다, 천부경은 일시 무시로 시작해서 기본“수”를 1석(析)3극(極)하여 천지인(天地人)셋으로 나누고 그 3이 4로 돌아 5를 이르듯 10이 궤안에 들어도 그 본은 변함이 없이 부동(不動)본(本)하는 본심을 말하고 일종무종으로 끝맺습니다. 그 후 2600년 전에 남아시아에서 석가보니 부처님이 오시어 진여, 자성, 불성, 법성과 본성을 말씀하시는데 자성을 깨달아 성불하는 법으로 49년간 중생을 제도하시었읍니다. 그 깨달음에 대하여 제자가 이 법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 만든것이야고 한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새로운 것이 아니고 숲속을 거닐다 예전부터 있어온 길을 발견하였노라 말씀하십니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도 자성불이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며 이러한 차원에서 과거 일곱분 부처님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2500년 전쯤에 동아시아에서 도서관리인이요 철학자인 노자와 정치지망생이며 교육자인 공자가 나와서 그때까지 수집 보관하여온 고전을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도(道)와 덕(德)을 논하고 천(天道=明明)과 덕(地德=新)을 따라야 하는 인륜(善=止善)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동양의 3교인 유불선(儒彿仙)은 동북아시아 상고사에 뿌리를 둔 천지인사상에서도 그 밑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불교와 도교(道=仙)는 그 실천과 외형의 근사성이 두 두러져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