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 언론인 조광동기자의 편지(2012.11.28. 림관헌)
안철수 대통령 출마 드라마가 끝났습니다. 안철수 현상이 한국 정치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 또한 놀라움으로 이 현상을 지켜보았습니다. – – – – . 역사 변화에 대한 열망과 열기는 가장 크게는 1945년 해방 당시를 시작으로 한국 역사에서 여러 번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의 모멘트는 25년 전 6.29였습니다. 당시는 시민들의 힘으로 변화의 계기를 만들었으나 김대중 김영삼 두 야당 지도자가 후보 단일화를 하지 못해 역사적 모멘트를 개혁의 동력으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6.29의 모멘트가 민주화를 제도적으로 구현시키는 열망이었던 것과 달리, 안철수 현상은 정치 풍토, 정치 문화를 개혁하라는 열망이었습니다. 한국 경제가 세계 선진 대열에서 주목받고, 한국 문화가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강남 스타일까지 세계인의 각광을 받는 마당에 한국 정치만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안철수 현상은 정치 개혁에 대한 갈망과 열망, 선진화로 가는 국민적 자존심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안철수 현상은 정치 개혁에 대한 목마름과 열망, 선진화로 가는 국민적 자존심이기도 했습니다. 안철수가 국민들 잠재의식에 불을 지폈고, 안철수를 통해 국민적 열망이 불붙었습니다. 안철수 현상은 안철수가 역사 변화의 에너지를 결집 시키는 능력과 자질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안철수 현상 같은 정치적 태풍은 쉽게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논리나 이성을 능가하는 감동과 갈망입니다.
안철수는 한국 정치 풍토에서 보기 드문 탁월한 품성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 개혁에 자신을 던지려는 열망과 헌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안철수 문재인 박근혜 세 후보 가운데 저는 안철수씨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안철수가 한국 정치 문화를 혁신할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안철수씨가 대통령 후보 출마를 한 뒤, 그가 음해와 왜곡과 극단주의가 풍미하는 한국 정치판을 개혁할 강인함과 뱃심과 리더십이 있을까 하는 불안이 고개 들었습니다. 안철수는 너무 선하고 착해 보였습니다. 그가 젊은이들과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게 하는 추상적인 비전을 보여주는 능력은 있었으나, 국민적 열망을 이끌고 갈 구체적 비전 정립되질 않은 것 같았고, 그가 처음에 표방했던 중도 정치의 철학에 구체성이 약해 보였고, 좌파를 의식하고 민주당 눈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안철수 현상이라는 거대한 폭풍을 일으킨 능력과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품격만으로도 저는 안철수씨에 대한 기대를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철수씨가 문재인씨와 단일화 협상을 시작하면서 제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습니다. – – –
단일화 협상의 가장 큰 쟁점과 걸림돌이 여론조사 질문서였을 만큼, 서로의 지지도가 가늠키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여론 조사로 대통령 후보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 – – 한국에서 막상막하의 대통령 후보를 여론조사로 결정한다는 것은 어이없는 경선 방법으로 한국 정치의 기형성의 일면입니다.
안철수씨가 물러가면서 선택은 문재인 박근혜로 압축되었습니다. 문재인씨의 긍정적인 점은 오늘 한국의 좌파 세력에게 부족한 겸손함과 성실성이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재인씨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자질이나, 리더십이 보이질 않습니다. – – – 문재인은 지도자의 이미지 보다는 참모와 비서의 이미지, 정치 테크노크라트의 한계를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정치 기술자인 문재인씨가 노무현을 극복하지 못한 것처럼 그를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노무현 세력, 좌파 세력의 영향력을 탈피하지 못할 것이고, 개혁의 대상인 민주당의 입김을 벗어 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완벽성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이나 결함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그것을 보완해 가면서 현 시대에 국가와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실천하는 능력입니다. – – – 자신이 그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하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 통과되었고, 자신이 참모로서 거기에 일익을 담당했던 한미 FTA(Free Trade Agreement, 자유무역협정)를 지금 와서 반대하고 폐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노무현 정부에서 결정한 제주도 해군 기지 건설을 지금 와서 번복하는 것은 이중적인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집권하고 있을 때는 그 필요성을 인식해서 찬성을 했으면서도, 지금 지지 세력의 지지를 받기위해 자기 결정을 뒤집는 것은 자신감이 부족하고, 기회주의적이고, 신뢰성을 상실시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나라를 책임질 수 있는 국가관과 안보관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최근 NLL(Northern Limit Line, 북방한계선) 거래설이 논란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도자의 적합성을 더욱 의심받게 합니다.
박근혜씨에 대한 제 선입견은 냉소와 거부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정치 입문을 했을 때,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이 저에게 강한 거부감을 주었습니다. – – –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치적 각광을 받는 것에 대한 냉소와 거부감은 박근혜씨가 정치권에서 오랜 좌절과 비바람 속에서 견디는 것을 보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치 출발을 했지만, 아버지의 후광과 그늘을 극복해 가는 역량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러한 객관적인 변화가 박근혜를 아버지로부터 놔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혈연의 인연에 매달려 있는 제 사고와 의식의 한계에 회의하기 시작했고, 제가 혐오했던 연좌제에 저 또한 갇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 -박근혜씨 에게는 기성의 한국 정치인과 다른 진지함, 성실성, 진정성이 있어 보였고, 경망스럽거나 술수적인 것이 없어 보이고, 사고와 언어에 절제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확고한 애국심, 자기 갈 길에 대한 소명감 같은 것이 있어 보였습니다. 박근혜씨도 타협과 양보가 부족한 모습이었으나, 최근 대통령 후보자가 된 후, 과거의 반대자들을 포용하고, 과거 박정희 시대의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의 행동을 보여주면서 마음을 열고 변해가는 모습이 저의 생각을 결단케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역사에서 여성 대통령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그동안 부패와 음모와 권모술수로 병든 남성 정치인 풍토에 새로운 여성 정치문화를 수혈할 수 있다는 기대를 걸 수 있게 했습니다. 안철수에게 기대를 걸었던 개혁의 가능성이 문재인 보다 박근혜가 더 많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 – –
제가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 장군을 역사에서 만난 것은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그 해, 1961년 5월 16일 새벽, 저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웅성웅성 둘러서 있는 동네 아저씨들 틈에서 아나운서의 혁명 공약 낭독을 가슴 설레며 들었습니다. 군사 쿠데타였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군사 혁명을 지지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16세 된 소년이 무슨 정치적 식견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때 저의 생각은 몹시도 가난했던 당시 제 주위 의식의 반영이었고, 기성 정치인에 대한 환멸에서 나온 것이었을 것입니다. 4.19 혁명에 감격했지만, 그 이후 걷잡을 수 없는 무절제와 무분별의 데모 속에 감격이 환멸로 변한 가운데 가난했던 사람들은 빵이 시급했습니다. 저는 박정희가 쓴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을 탐독하면서 박정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어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학원가를 휩쓸고, 거의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 앞장섰을 때, 저는 한일 협정을 찬성하는 외로운 이단아였습니다. 박정희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변한 것은 3선 개헌 부터였고, 유신이 선포되면서 저는 격렬한 박정희 반대자가 되었습니다. 한 때, 진보주의자였던 저는 많은 사상적 방황을 하면서 서서히 중도의 길을 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가슴과 사고에는 늘 보수와 진보의 두 이념이 끊임없이 교차하고, 미국 정치에서도 공화당 민주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이른바 독립 투표자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 – –
제 마음에 있었던 박정희에 대한 극단적인 두 생각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국의 근대화와 조국의 민주화에 함께 열광했고, 거기에 제 젊은 시절의 열망과 열정이 함께 있었기에 제 철학에서 박정희의 산업화 독재와 화해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제 철학에서 박정희와 화해하고, 근대화와 산업화가 화해한 바탕에서 조국의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제 내면의 심리적 화해의 실마리를 박근혜씨를 지지하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비극적으로 잃었던 박근혜를 통해, 한국 정치의 과거와 현재가 화해하고, 산업화와 민주화가 화해하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역사의 상처를 아물리고, 화해를 통해 조국 정치가 도약하고 선진 정치로 웅비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박근혜씨가 아버지의 성공한 신념의 품성을 계승받고, 아버지의 실패한 신념의 잘못을 극복할 수 있다면, 역사에 공헌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박근혜씨가 이런 기대에 부응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동안의 박근혜를 통해 저는 그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제 희망과 기대가 옳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 마음에 박정희와 화해하고 미래의 조국이 더 큰 도약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서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박근혜씨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미국에서 투표권은 없지만 마음의 성원을 보냅니다. (2012년 11월 25일)
조광동 선생에게 보내는 답신
(2012.12.1. 이멜 yahoo.com)
오랜만에 조 선생님 글을 보니 반가웠고 건재한 필치를 보니 더욱 기쁩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 알링톤하이트에서 열린 미팅에서도 오랜만에 지인들과 함께 토론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근래에 드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보내주신 이멜과 첨부된 파일을 꼼꼼히 읽고 다시 뜯어보고 조 선생의 사색과 행동의 역정을 살펴보면서, 그때 그 시절, 내가 서있던 같은 한국의 격동하던 역사의 중심에서 작열하던 청춘, 홀로 앉아 역사의 철학적 의미를 음미하던 무대 위의 나와 이웃들을, 이제 그 무대 앞에 앉은 한 사람의 청중이 되어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늘 내가 좀 늦둥이(나이에 비해 좀 늦게 성장하는)였는지 아니면 그것이 그 또래의 정상(正常)이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여왔는데 조 선생이 5.16혁명소식을 접하며 출렁이던 감동을 고등학생시절이 아니라 대학생이던 학적보유병 근무시절에 느끼었다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미국에 정착하면서 내 나이를 10살을 줄이고 어린 행동을 하기로 작정하고 살았으니 아마도 내가 미국 생활하는 태도에서는 조 선생보다 어리게 행동하였을 것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