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혁명과 혁명재판소
필자의 병영생활은 참으로 운이 좋았다. 낮에는 특별재판소에서 이러나는 현황을 6하(何)원칙에 의하여 보고서를 작성한 후, 18시 1군사령관 실 일직하사관에게 전화를 걸어 읽어 내리면 그 쪽에서 받아 적고, 다시 읽으며 확인하면 일과가 끝난다. 본부병력(장교포함10여명)은 비상소집이 없는 한, 아침이나 취침점호도 없으며 서울에 집이 있는 사병들은 요령껏 자택출근을 할 수 있었다. 그야 말로 필자만 빼고는 ‘빽’(?)이 든든한 사람들이어서 그냥재미로 바가지(헌병제모)를 쓰고 두 친구가 부대부근을 순찰하며 나쁜 짓을 가려하는 ‘X뼉다구’헌병도 있었으나 필자는 같은 내무반 친구를 꼬두겨 새로운 프로가 있을 때마다 부대 옆 대한극장 임검석(극장마다 경찰이나 헌병을 위한 좌석이 있었음)을 차지하고 극장이 파하면 10원짜리 한 장식을 들고 아스토리아호텔 뒤 제과공장에 가 터져 벼려야하는 싱싱한 생 크림빵을 싫건 먹고 나오곤 했다. 이 무렵, 정권을 물려받은 장면총리정부(윤보선 대통령)의 무능으로 사회는 빈곤과 실업의 악순환으로 불안하였으며 4.19민주혁명의 후속처리도 제대로 못하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군대는 정부의 요청으로 4월, 5월 위기설이 난무하는 사회질서와 헌정보장을 위한 데모진압계획과 출동훈련을 계속했으며 9사단 헌병중대를 필동으로 이동하는 등, 정부 중요 건물과 고위인사에 대한 경호지원에 만전을 기했다. 이러한 국군의 서울 위수(衛戍)임무는 그것이 민주당정부의 요구에 의한 충성된 군의 임무였으나 육군본부와 국방부 등 서울에 근무하는 김종필과 밀통하던 중령급동기생들과 박정희 소장에게는 그들의 야심(우국충정이라 해도 좋고)을 성공시키는 절호의 기회였다. 서울의 헌병감실 직속부대, 육군본부 7헌병중대, 1군 1헌병호송중대(50헌병중대), 9사단헌병중대, 경기지역 2개 사단의 2개 헌병중대는 7헌병중대를 제외하고는 5월 15일부터 헌병감의 지휘아래 통합 데모진압훈련에 돌입하였다.
바로 이런 시기를 D-day로 잡고 대한민국역사상 가장 불행한 장면 중하나인 군사혁명의 길을 열었다. 필자는 일개 사병임으로 위에서 이러난 일들을 알 수 없지만 필동에서 그날 밤과 다음날 새벽에 이러난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중대는 이미 국방부와 그 산하기관의 경비임무를 위해 대부분의 병력이 파견근무를 함으로 본부인원 10여명만이 통합훈련에 참여하도록 계획이 짜여있었다. 5월15일 밤 7시 1군사령부에 전통을 보내기 위해 직통전화를 돌리니(우리는 야전용 전화를 손으로 돌리었다) 상대방 숙직하사관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자는 경비행기를 이용 여의도비행장을 출입한 장성들의 현황을 보고하고 30사단에서 소요가 일어나 헌병감실 수사대가 급파된 일이며, 곧 통합훈련비상이 걸려 곧 9 헌병중대에 합류해야한다고 보고했다. 너무 가벼운 보고이기도 하지만 그날이 1군사령부창립기념일이어서 1군사령부예하 장군들은 물론 관계 미군관계자들까지 파티에서 녹아있었기 때문에 보고가 제대로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미 혁명군과 손이 닿아 있던 헌병감이 30사단소요내역이나 7헌병중대의 출동준비 등에 대하여 최강의 1군사령부에 알려주었을 리가 없다. 필자 등 우리 본부인원 일부는 잘 알지도 못하는 장교인솔하에 남산 중앙방송국을 향해 떠나면서 군 배치 후 처음으로 실탄 탄창을 배급받고 너무 오발이 두려워 첫 탄환을 거꾸로 장전하여 두었다. 새벽역에 대하군(훈련 시 적군역활하는 부대)으로 짐작되는 부대로부터 나오는 총성을 들으며 서울시민이 놀랄 것을 걱정하였지 “대항하지 말라-오발이라도 총을 쏘면 몰살 된다”는 명령이 실전명령인 것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해서 혁명의 밤은 밝아오고 우리 졸병들은 영문도 모르는 훈련출동이 혁명군에 협력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대사무실에 들어와 ‘국방부건설 본부’ 파견대(남대문 맞은편)로부터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하고”로 시작하는 혁명공약의 내용을 전통 문으로 밭고 다시 이것을 제1군사령부에 전통보고 한 후에야 뛰는 가슴으로 심호흡하며 올 것이 왔다는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그 후 우리 중대에는 그 당시 최태섭 등 재벌들의 수감, 혁명재판소 수감자 관리 등을 하면서 상등병 임관헌(군번10630926)은 일반군번을 받고도 61년 8월 초 운 좋게 학보제대를 하고 또 다시 고시(高試)파 학생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