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선하게 산다는 것(2015.10.5. 칼럼)(6) 국가의 경영철학(經營哲學)과 지도자의 천하관(天下觀)-i)
인간의 지도자-천하를 제 집안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제왕(帝王)은 언제나 하늘을 대신하여 인간사회를 이끌어 가려고 하였고, 그것을 그 인간사회의 천하관이라고 하여왔었다. 천명(天命)을 실천하던 제국의 지도자가 살아진 지금은 각국의 지도자가 자기들 전통에 따른 국가관을 내세워 한 나라를 이끌어 가는데 오늘날과 같은 시대상황에서는 그 인간사회의 보편적 정의를 내세우는 국가관으로 집권하고, 그것이 그 사회를 행복하게 한다고 실증하려한다. 인간은 <사회적(社會的)>동물이다>라고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가 말했다. 이 말은 “사람이 정치적 동물”이는 것이지만 어찌 그것이 사람뿐이겠는가-다른 많은 동물이나 식물이 단순히 개체보존의 본능을 위해 사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끼리끼리 어울려 집단을 이루고, 일정한 룰에 따라 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풀꽃도 끼리끼리 피고, 아프리카에서 얼룩말도 끼리끼리 집단을 이루가 사는가 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나라 오래 된 역사책 중 하나인 박제상(AD363-418)의 징심록(澄心錄)에서 빙하기이후 소수의 인간들인 마고, 궁희(弓姬), 소희(巢姬) 등 3신(神)과 3신의 자손인 황궁, 청궁씨, 백소, 흑소씨 등 4천인(天人)에 대한 기록이 하늘, 신, 사람가의 관계와 철학을 잘 전해주고 있다. 박제상이 징심록 15지(誌)를 짓고, 그 아들_백결선생이 금척지를 지어 징심록16지가 대대로 그 자손에게 전해오고, 세종 때 징심록을 읽고 김시습이 지은 징심록추기를 합하여 17지라 하였다. 금척은 왕의 징표로 박혁거세가 소지했었다고 하였고, 이성계는 남해 금산에서 꿈에 그것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 우리가 아는 박제상(삼국유사에서는 김 씨로 표기)은 당대의 엘리트요, 충신이던 것을 여러 역사기록에서 볼 수 있으나 그가 지은 징심록15지와 백결이 지은 금척지(金尺誌), 합 16지는 가문에 비전되어 오다가 55대 박금씨가 광복 후, 북한 땅에 그것을 두고 남한으로와 남북분단으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고, 박금 씨가 1953년 복원한 상, 중, 하교 중에서 상교 제1지인 부도지만이 근세 한자로 기록하여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부도(符都)와 김시습의 징심록추기, 그리고 박금씨의 요정징심록연의(要正澄心錄演義)에 그 대강이 전해지고 있으나, 세종대왕이 그 후손(39, 40,41대)영해 박씨 종손을 서울에 불러올려 중용하고, 김시습이 대왕의 훈미정음창제에 기본이 되었다고 추기에 썼으나, 실록엔 그런 기록이 없지만, 41대 박계손이 세종의 유지로 병조판서로 등용된 것은 징심록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만하다.
부도지는 빙하기에서 생존한 현생인류가 BC7,000년경까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파밀고원으로 추정)에 부도(符都)라는 이상향(理想鄕)을 만들어 천(天)부(符)의 이치를 따라 살다가 인구와 환경의 변화로 4개 부족(인구 1만 내지 1만 5천)이 4방(方)으로 나누어 황궁은 북쪽, 백소는 서쪽, 청궁은 동쪽, 흑소는 남쪽으로 끼리끼리 떠나면서도 천부를 모시고(奉受天符) 부도(符都)를 복건(復建)한다는 마고(麻姑)복본(複本)-부도를 다시 세운다-을 맹서(盟誓)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도의 존재와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증명하려면 황궁씨의 천산이주후인 유인, 한인, 한웅 씨의 유적, 유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BC8000-BC2000년)의 전신(前身)인 부도문화의 유물, 유적이 마고 성 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는 천부의 정치절학-천하관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할 것이다. 2014년 가을 북경 수도(首都)박물관에서 고대 중국옥문화전시회가 열렸고, 그 전시품 중, 필자가 확인한 약3cmx4cm크기의 아름답고 방금 조각한 것 같던 진초록 옥저용(玉猪龍)에 “홍산출토 1만 년 전 추정)이라고 표시된 것을 보고 환희했으며, 지금 것 중국정부가 홍산문화에 대한 공개를 꺼린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것을 확인해주는 옥(玉)전시(展示)도록(圖錄)을 구입해 왔다. 만약 파밀과 천산지역(현CIS)에서 흘러온 문화교류의 흔적인 유물 유적의 원류(源流)를 발견한다면 그 당시 오랜 기간 전지구의 혹독한 빙하기를 오직 마고 일족이 살아남고, 그들 후 손들이 지켜온 부도의 모습과 그 부도를 이끌어 온 천부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 또는 단군조선(BC2333-BC194)이 동아시아 역사에 처음으로 한(漢)족의 나라라고 자칭하는 한 고조 유방이 개국한 한(漢=BC206-AD220)지역망명객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내주고 마한으로 밀려간 후, 천손(天孫), 봉수천부(奉受天符), 부도복본(複本)이라는 민족철학, 홍익익간의 천하관이 점점 현실에서 멀어져갔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말, 후3국시대인 52대 효공왕(897-912)의 후계문제로 국론이 분분할 때 문현(박제상 14세손)공이 “신라입국(立國)의 근본이 부도(符都)를 복건(復建)하는 데 있다며, 고조선은 사해(四海)의 공도(公都)요 단씨(檀氏)의 후예(後裔)는 그 심부름꾼”이다라고 주장, 결국 박혁거세의 종손-신덕왕(912-917)을 세우는데, 이것이 우리 민족사(民族史)상 마지막 천하관을 관철한 사례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