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년의 긴 시간을 한눈에 보고 쓰는 작업(2016.4.4. 기사를 지난 다시 읽고. 림관헌)
4월 05 2016
역사를 물 흐름 같이 쓰고 여러 가지 오류를 바로 세우는 것은 9세(世)-10세(世)호상(互相)즉(卽)이라도 – 250년이 훌쩍 넘어, 너무 긴 세월, 보통사람으로서는 자기를 확신시키기 위하여도 많은 기록과 유적(遺跡-遺蹟)의 퍼즐을 실로 꿰는 어려운 작업이다. 단기 4348(AD2015)년 1월 25일 자로 한국고대사의 한 구획이 되는 고구려 건국과 그 주변, 그리고 그 시대의 역사를 2중, 5중의 증거를 맞추어, 이웃 중국대륙의 왕조사기록까지 채증자료로 맞춘 것은 인내와 집중을 통한 재외동포신문 이형모대표의 열정, 상상력이 논리 정현(正弦)하게 실제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듯, 확신을 옆에서도 느끼게 한다.
<기사 내용>
안녕하십니까? 새해가 되고나서 두 번째 드리는 <역사산책>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중요한 역사서로 취급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 중에 중요한 오류가 있어서 문제제기를 합니다.
동명왕은 고구려의 시조가 아니라 졸본부여를 세워서 스스로 ‘동명왕’으로 일컬었고, 22년을 다스리다가 쇠약해진 북부여의 ‘4대 고우루단군’을 밀어내고 ‘북부여의 5대 단군’이 되어 27년을 더 다스립니다. 동명왕이 (5대)고두막단군이 되어 북부여 통치 8년차에 고주몽이 태어나고, 21세에 동부여에서 북부여로 망명해 온 고주몽은 고두막단군(동명왕)의 아들인 (6대)고무서단군의 사위가 되고 그 이듬해 고구려를 창건합니다. 동명왕과 고주몽은 그런 특별한 관계입니다. 삼국사기 처럼 동일인 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동명성왕과 고주몽은 어떤 관계인가?>
휴애거사 범장이 편찬한 ‘북부여기 하권’은 동명왕 이야기로 시작된다. BC108년, 이 해는 북부여 4대 단군 고우루 13년이다. 제(帝)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동명왕 재위 22년(BC 87년)에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 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을미 23년(BC 86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동명왕(고두막단군)이 이를 듣고 고우루단군의 동생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동부여)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 5대 단군에 즉위하였다. 가을 8월에 서압록하의 상류에서 한나라 도둑과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임인 30년(BC 79년)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능에서 태어났다. 신유 49년(BC60년) 고두막단군이 붕어하고 유언에 따라 졸본천에 장사지냈다. 태자 고무서가 등극했다. 고무서단군은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다. 계해 2년(BC 58년) 겨울 10월에 고무서 단군이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BC 108년은 연나라 사람 위만이 북부여의 서쪽 지방인 번조선을 점령하여 86년이 지났는데, 그 해에 위만의 손자인 ‘우거’가 한 무제의 군대에게 멸망했다고 ‘사기’는 전하고 있다. 같은 해에 동명왕은 ‘졸본부여’를 세우고 군대를 일으켜 한 무제의 침략군을 물리쳤다. 동명왕의 궐기는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져서’ 이를 물리치고자 군대를 모으고 졸본부여를 세운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 115권 조선열전의 기록은 “우거를 죽인 것은 한 무제 유철의 군대가 아니고 우거의 통치를 받던 번조선의 원주민 ‘최’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우거 다음의 반항자 성기를 죽인 것도 번조선 사람들이었다.” 동명왕은 유민과 힘을 합하여 한나라 도둑들을 연파했다고 기록되었는데, 유민들이 바로 번조선 사람들인 것이다.
동명왕과 번조선 유민들에게 참패한 한나라 군대는 본국으로 귀환해서, 육군사령관 좌장군 순체, 추가 파병된 위산과 제남태수 공손수도 모두 능지처참에 해당하는 ‘기시’로 처형당한다. 해군사령관 누선장군 양복은 관직을 박탈당한다. 전쟁에 참여했던 장수들이 이렇듯 처형당한 것은 북부여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돌아갔다는 반증이다.
동명왕은 졸본부여의 왕으로 22년을 재위하고, BC 86년에 북부여 고우루단군의 항복을 받아 북부여 5대 고두막단군으로 즉위하고 27년을 다스린다. 왕과 단군으로 모두 49년 동안 재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기세등등한 중국의 통일제국 한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북부여를 지켜낸 공적으로 후일의 역사는 고두막단군 보다도 ‘동명성왕’으로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시조는 동명성왕이요 성은 고 씨 휘는 주몽이다.”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을 한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 두 가지 모두 잘못된 기록이다. 동명성왕은 대부여의 마지막 임금인 고열가단군의 후손이고, 고주몽은 북부여를 창건한 해모수단군의 차남 고진의 손자인 불리지 고모수의 아들이다.
동명성왕이 고두막단군으로 즉위하여 북부여를 통치한지 8년차인 BC 79년에, 고주몽은 동부여(분능)에서 태어났다. 나이 7세에 직접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렸다.
해부루가 다스리는 동부여에서 ‘금와’가 태자로 책봉되자 BC 59년에 ‘고주몽은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죽이려 하니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으로 북부여로 망명하게 된다. 그 후 고두막단군(동명성왕)의 아들 고무서단군의 사위가 되고 이어서 고구려를 창건하게 된다.
“BC 47년 동부여의 금와왕이 즉위 원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쳤다. BC 24년 유화부인이 돌아가시자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을 보내 졸본으로 모셔와 장사지냈는데 황태후의 예로서 억지로 산 같은 능을 만들고 곁에 묘사를 짓게 하였다.”
북부여 5대 단군이 된 동명성왕은 중국의 통일제국인 한나라가 동진하여 북부여를 침공해 왔을 때 이를 분쇄하고 단군조선과 대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아 나라를 굳건하게 지켜낸 임금이다. 그리고 추모대왕(고주몽)은 북부여를 이어받아 만주와 한반도에 고구려를 창건함으로 ‘한반도 역사시대’를 열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하신 임금이다.
단기 4348년 1월 25일 재외동포신문 대표 이형모 드림>
이 이형모님의 역사 산책은 가벼운 산책이 아니라 고구려건국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호태왕비(好太王碑)나 북부여의 고토(故土) 내 각종 유적(遺跡 遺蹟), 이웃 나라의 역사, 문물 등의 증거로 그것이 사실(史實)임을 증거 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검증과 논리로 현재 우리나라역사학계에서 단군조선 2300년사를 아직도 신화(神話)라며 단군조선에 대한 모든 역사서를 위서(僞書)라는 오중(五重)증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그들의 스승이며 사대(事大)식민사관의 태두 고이병도가 1986년 10월 조선일보에 발표한 단군(檀君)실사(實史)론까지 외면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지방과 한반도에서 발굴되고 발견되는 단군조선시대, 한웅, 한인씨 시대의 유물, 유적은 물론 그 지역의 인문사를 연구하는 중국 등 세계 석학들에 의한 연구 성과로 고기, 사기, 서경, 산해경 등 지상자료의 진위(眞僞)설이 사실(史實)로 증거 되고 있음을 외면하는 어처구니없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19세기 초, 은허의 발굴이 있기 전까지, 이병도 등 조선사학계와 동일하게 과학적 증거론을 내세워 온 청나라 후기에서 중화민국초기의 역사학자들이 중국사학을 BC1800으로 끌어올리고 사마천사기와 사서, 삼경 등 고전에 실린 역사를 다중증거방식(直, 間接史料)에 따라 신농, 황제, 치우, 요, 순, 하우, 상탕, 주 무왕 모두를 포함하는 5천사를 실사로 공인하기에 이르렀으나 많은 우리나라학자나 국민들은 아직도 일제의 망령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게으른 못난 후손이 되어있다.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망극한 시기에 이형모 대표의 논지가 여러 학자들 심금을 울려주고 조국의 역사를 외면하는 많은 국민들의 마음의 눈을 열게 하길 기원하는 바이다.
About the Author
Edward Rim – 림 관헌, 한미 시민 연합 초대회장 역임, 공화당 The President Task Force 멤버, 시카고 중앙일보 객원 논설 위원, 대한민국 평화통일 자문위원 역임, 시카고 상록회 이사장 역임, 시카고 불타사 지도법사, 미 중서부 한미 장학회 회장 역임, 미 중서부 전통 예술인 협회 이사, 상임고문, 성균관 대학교 유학 및 동양철학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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