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미국포교의 역사와 그 현주소-시카고지역을 중심으로(2014.5.9.)

한국불교 미국포교의 역사와 그 현주소-시카고지역을 중심으로(2014.5.9.)

1. 한국스님들의 미국 포교

현 한국불교는 1600여년의 긴 역사와 그 특유의 전통에 따라 불교의 진리를 우리식으로 융합(融合) 발전 시키고, 한국과 지구상의 각국에 그 사회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포교하며 이 시대에 부처님의 광명을 새롭게 하고, 세계평화와 민물의 행복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2014.4.28-5.9.), 필자가 한국에 체류하면서 미주 한국불교 양대 포교지 편집인들이신 김. 이 두 거사님의 미주 한국불교 포교의 <시조> 논쟁이 일파만파로 조용하던 미주 불교계에 번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이 한국불교 미주포교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970년대 한국불교가 한국 승려들의 육성으로, 본격적으로 미국에 소개되고, 이미 미국에 자리 잡은 일본 불교, 남방불교, 티베트 불교, 중국 불교와 그 무렵 새롭게 소개되는 베트남과 한국불교가 당시 미국사회를 풍미하였던 “히피문화”, 특히 극심한 물질문명의 폐해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신적자유와 진정한 행복을 찾는 문화적 변화에 힘입어 명상과 참선운동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모든 종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점에서 한국불교도 한국인의 대량 미주 이주와 함께 신장하게 되는데 아시아계 이민억제가 대량 완화되는 1961년 케네디 정부 이후에 현저하게 늘어나게 됩니다. 특히 6.25전쟁 휴전 후, 귀국하는 연합군을 따라 온 신부들과 유학생들, 1970년 전후,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의 미국이주, 가족이민 등 이주기회의 증가로 한인사회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불교도 자연스럽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국가인 미국에서 아시아 등지의 고유종교가 공식적으로 묵인 내지 환영받게 되는 계기는 미국이 유럽의 식민지국가로부터 세계의 모든 인간과 문화의 중심으로, 세계 제3제국으로 돌입하는 변환기인 1893년의 시카고 콜롬비안 박람회(콜럼버스 미주 발견 400주년)-세계 종교의회의 초치(招致)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세계종교계의 변환기에 우리 한국불교는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에서 겨우 기지개를 펴며 극히 소수의 개화 승(?)만이 일본불교의 미국진출에 끼어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LA 등 까지 다녀갔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기독교와 달리 조선 이민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 하였습니다.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종교지도자들이 한데모여 종교의회를 연 제1차 종교의회에는 대표는 고사하고 옵서버로도 참석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1983년에 1893년 종교의회를 기념하여 3일간 시카고에서 열린 제2차 종교의회에 한국불교계가 참가하는 것을 이 회의개최를 주관한 컴미티에서 일을 거들면서도 한국불교는 고사하고 그 당시 국교로 존중받던 유교도 이에 참가했었다는 기척이 없음을 본인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즉 1893 시카고 박람회의 조선대표는 정 경원 대사였으며 그를 도운 유학생 두 사람이 관대를 정제한 관복을 입고 있는 스케치도 전해오고 무기, 의장(儀裝)구, 가마, 악공들과 외교관들을 초청한 리셉션의 메뉴 등에 대한 물질적 기록이 시카고 발물관 보관실에 남아 있을 뿐 우리 종교인들의 정신문화교류의 장에 참석한 흔적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감안해서라도 한국불교가 미국에 진출하는 시기는 서 경보, 이 행원(숭산), 석 삼우, 오 법안, 구산 등 큰 스님들과 이 한상, 이 장수거사 등이 미국에 왕래하거나 거주하면서 미국이주 한인들과 미국인들에게 그들 나름대로의 포교를 시작하는 1970년을 전후한 시기라고 할 것입니다. 제대로 된 체계적인 포교계획이나 각 종단의 포교지침도 없이 유학(留學)승은 학업의 틈을 타서, 방문 또는 거주승은 이미 동양사상에 심취해 있던 인사들과 상호접촉을 통해서 또 현지 불교신도들의 초청을 받아 온 수님은 그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점차로 한국불교를 미국에 심어가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지금 미주현대불교가 1964년을 한국불교 미주포교의 원년으로 하여 금년을 미주포교 50주년으로 기념행사를 하려는 과정에서 과연 템풀대학에 유학 오신 서 경보 스님의 미 입국 년을 미국의 한국불교포교 원년으로 보는 것이 마땅한가에 대한 논의가 불거진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일제 지배 시에도 한국 스님의 미주 방문과 이주가 있었다고 하고 행원 숭산 스님이 일본과 홍콩에 이어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에 대한조계종 홍법(弘法)원 간판을 내거시고 본격적인 한국불교포교를 시작하시기 전에도 몇몇 스님을 비롯해서 적지 않은 스님들과 불교학자, 신도들이 미국 내에서 한국불교수행을 했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 오신 스님들의 행적은 한국불교포교의 시작 또는 시조(始祖)논쟁과는 관계없이 진실 되게 연구되어질 문제이지 생전에 스님들께서 전혀 말씀하시지 않은 문제로 논쟁을 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될 수 없고 자칫 편파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승산스님께서는 1972년 미국동부로 입국하신 후, 프로비던스 근교의 명문 부라운 대학을 중심으로 일본불교수행자들을 제자로 삼아 미국인들에게 한국불교를 전파하는 동시에, 이어서 한국인들을 위해 뉴욕 원각사를 창건하시고, LA에는 한때 한국에서 상좌였던 계정 당을 불러 달마사를 세우시고, 이어서 1974년 부처님 오신 날, LA달마사 행사에 가시는 길에 시카고(소이어)의 작은 아파트 건물에 이 장수거사와 일본에서 숭산스님의 유발상좌였던 손 지학 스님을 삭발케 하여 세운 불타사에 오시어 점안, 수계식과 첫 4.8행사를 주관하시었습니다. 이로서 승산스님이 오신지 2년 만에 미국의 동, 서, 중부지역의 포교망을 완성하셨으며, 펜으로 손수 쓰 신 40 페이지짜리 <禪羅針盤=Compass of Zen Teaching>을 지침으로 누구나 알기 쉬운 불교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선의 나침반은 스님께서 깨치신 바를 순차적 이해와 구경열반의 진리를 진서(眞書-뜻글)과 영어로 간단명료하게 도표같이 만들어서 초보자가 보아도 쉽게 들어가고, 주위를 맴돌던 멍텅구리불자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만든 명저입니다. 후에 제자들이 그것을 만(萬)자로 늘려 책을 썼지만 그것은 다 이 나침반 안에 있고, 하버드에서 화계사로 온 제자 현각의 명저인 은 100배의 글자를 모아 400페이지에 달하지만 스님의 나침반을 다 카버하지 못했다고 할 것입니다. 스님은 아침 종성(鐘聲)에서 사시와 저녁예불까지 한국불교의식을 서양 악보를 보고 외우듯이 매일 똑같이 음송(吟誦)하시고 제자들도 이를 따라 음악을 하듯 일정하게 노래로 하였고, 절하고 걷고 발우공양하고, 좌선, 행선, 울력을 하는 거동이 늘 신선(新鮮)해서 스님 곁에서는 늘 시원한 선풍(仙風)이 옷자락에서 펄럭이는 듯 했습니다.

2. 시카고의 한국불교

시카고에서도 스님이 오실 때까지 한국불교신도들은 소통이나 모일 길이 없어 한국기독교회, 일본불교사원에서 아는 불자끼리 모이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시카고에서도 숭산스님이 지도하신 불타사보다 몇 개월 앞서서 원불교신자들의 모임이 시작되었고, 구 불교 신자들까지 함께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었었습니다. 스님이 오시어서 대(大)자를 차례대로 하여 수계를 하시고 불명을 주시었는데 필자는 대지(大智)라는 불명을 받고 너무 감복해서 문수사리보살을 멘토로 하라는 것이리라 새겨두었습니다. 그래서 스님 설법차례가 오자 나도 모르게 스님께 세 번 절하고 엎드려 이생 처음 청법계를 올렸습니다. 참으로 제가 홍성고등학교 2학년운동회 때 승복을 빌려 입고 가장(假裝)행렬에 나가 천수경을 외우고, 대학교 1학년 때는 개운사(후에 중앙승가대학으로 개교)에서 모이던 대학생불교모임인 정법(正法)회에서 신식불교를 한답시고 <붓다 사라남 갓자미-달마 사라남 --->을 노래로 부르던 일, 대학 2년 여름방학 때 고시공부를 한다며 남한산성 장경사에 들어가 스님이 출타하여 새벽예불이 걸릴 참이면 찬물에 세수하고 그 깊은 산골이 떠나가도록 목청을 돋구며 도량석을 올린지 10년 만의 일이며, 동쪽에서 온, 달마 – 숭산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눈을 다시 뜨고 환희심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들어와 1년은 어떻게 정신없이 지냈는지 자세히 기억 할 재미동포들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가난한 학생 들, 여름방학동안 일자리가 많은 시카고로 몰려와 실비로 교회가 운영하는 학생관에서 머물며 일요일이 되면 교회로 가는 대부분의 늙은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고집 센 불교신자는 곧 그들 끼리 어울리게 되고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일본 절 <시카고 북교가이>로 가서 구보세센세이라는 일본승려의 지도로 일본식 좌선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한국계 지도자 철학을 공부하던 최 일당과 그 보살, 그리고 필자도 그런 부류의 불자였는데 우리들은 불타사가 생긴다는 광고를 보고 제일먼저 뛰어가서 비슷한 처지의 한국불자들과 맛나게 됩니다. 원불교에 갔다가 돌아온 보살님들이나 한국에서 계와 불명을 받은 분들은 승산스님의 계를 받지 않고 예대로 그들의 법명을 그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숭산스님이 다녀가신 후, 우리 불자들은 신도회를 조직하고 지학스님을 주지스님으로, 이 장수씨를 법사님으로 모시고 법사단의 포교활동을 지원하는 신도회를 법인체로 만들기로 하고 미 국법에 따라 비영리 법인로 운영할 합리적인 불교사원관리조직 회칙(시카고불타사불교신도회)을 만들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신도중에 시민권자인 세 사람의 설립이사가 없었음으로 신도회 재무 박영규씨가 아는 미국인들의 서명을 얻어 총무 대지, 감사 최 일당으로 일단 시카고 불교신도회를 출발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1년도 채 못가서 불타사의 관리주체와 신도회회칙을 둘러싸고 이 장수법사가 현대불교(후에 법춘스님의 불심사, 영주스님의 봉불사)로 분립하고, 법사단과 신도회 양립구도도 개정되어 불타사도 한국불교에서 보듯 주지 중심제로 개정되었습니다. 승산 스님께서는 조계종 종립동국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오 법안스님이 뉴욕에 오시자 원각사에 초청하여 머무시게 하였고 법안스님이 승산스님과 상의없이 원각사 주지가 되자 무심하게 절을 버리고 따로 조계사를 창건하시고도 두 분 사이는 무탈했고, 법안 스님은 불타사에도 다녀가셨습니다. 숭산 스님께서는 보통사람들은 스님에게 배신을 하였다고 생각될 만한 스님들도 아무러치 않게 잘 대해주시고 자신을 홀대하거나 배척해도 절이나 불교도 모임에 가까이 오시면 반듯이 찾아가서 부처님께 참배를 하고 법담을 나누었음으로 주위의 제자들까지도 그분들의 지난날 악연들이 있었는지 모를 판이었습니다. 1983년 시카고 제2차세계종교의회가 열리자 프로비던스 젠 센터와 뉴욕원불교가 한국종교계를 대표하여 참가하게 되고 숭산스님께서는 두 세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회의 첫날은 달라이라마께서 그랜트 팍(현 시카고 밀레니움 팍)에서 기조연설이 있었고, 달라이라마의 기조연설 폐막에 시간을 맞추어 그 맞은편 콘티넨탈호텔에서 숭산스님이 초대하고 프로비던스 관음선종학교가 주관하고 시카고 소재 환태평양문화재단이 후원하는 세계불교도대표 초정 리셉션이 있어서 가히 그 날은 우리 승산스님의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날 법춘스님이 밤 새워 만드신 세계불교기가 호텔 리셉숀장에서 아시아와 서양의 불교인들을 맞이했으며 한국에서는 법륜스님과 강 원룡목사가 다녀가시고 시카고에서는 홍선스님, 법춘스님, 영주스님, 이장수 거사, 최일당 거사, 필자 등이 참석해서 1983년 처음으로 한국불교 승려들이 세계종교의회에 등록하였습니다.
경보, 구산, 고암, 청화, 설정 스님 등 한국불교계의 종장(宗匠)급 큰 스님들을 비롯해서 많은 스님들이 미국을 다녀가시고 나름대로 포교와 전법에 힘쓰시었지 만, 숭산 큰스님 같이 30년이 넘는 기간을 주로 미국에 주석하시었고, 유럽, 구소련 등 동구 각국,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한국 등 각국을 순회하시어 시카고 보살들을 스님은 <하늘의 사나이>라고 그 행원을 높히어 불러왔습니다. 1980년대에는 시카고지역의 남방불교신자들의 모임(인도인 다난제 구룹)을 매년 참선지도하시고 시카고에서 멀지 않은 켄터기와 캔사스지역의 미국불자들과 토마스 머틴신부가 주석한 일이 있는 게세마니수도원을 매년 봄 마다 방문, 한국식 용맹정진으로 참선을 지도하셨습니다. 특히 켄터기 렉싱톤에서 가까운 퍼너스 마운틴의 수 백 에이커 땅에 한국식 법당을 짓고 개원식을 할 때에는 수도원 원장님도 축사를 하시었고 시카고에서도 지학스님, 최일당거사님 내외, 필자 등이 참석해서 부처님 복장에 시를 받쳤습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시에는 “1500년 전 달마가 서쪽에서 오시더니 오늘 숭산은 동쪽으로부터 와서 점하나를 찍었네- 억!”으로 적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화로(火爐)산(퍼너스 마운틴) 대각(大覺)사는 동부의 이 보리거사(후에 화와이에서 출가)와 중부의 필자가 모금에 참여하고 렉싱톤대학 심리학주임교수 로버트 겐토(대각 선사), 신부였던 현도스님, 그리고 많은 미국인 신도들이 자원봉사를 하였으며 산세가 웅장하고 주위에서 산삼이 많이 나며 암벽과 그 절터가 한국의 명산을 닮아 모두 환희에 차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숭산스님의 제자 대명스님도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불교신문의 이 기자님이 숭산 스님은 미국에 포교시스템을 만드시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잘 관찰한 것입니다. 위에 든 숭산 tm님의 <선 나침반>은 세계포교의 기본서이며 어느 나라에 계시던 맞나는 사람에게 알맞은 쉽고 곧바른 길로 할과 방을 자유자재로 쓰시었는데 그것이야 말로 세계적 사유의 유통이라는 것을 지금도 깨닿게 합니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스님은 남방불교건, 중국이나 일본, 티베드 불교건, 인도나 서양 불교건 차별하지 않고 불법을 상론하시고 천주교와 기독교 성직자들과도 수행을 함께하시며 서로 상통하시었습니다. 생전에도 그러셨지만 적멸에 드신지 10년이 되는 오는 지금도 세계 각국과 한국의 수많은 제자들이 숭산스님의 시스템에 따라 불교공부와 포교에 정진하고, 금년 가을에는 한국에서 셰계일화대회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미국 땅에 누가 먼저 발을 들여 놓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느 스님이 한국불교를 미국에 법대로 포교하시었는지 제대로 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은 푸르고 펼쳐진 들판에서는 옥수수가 파랗습니다. 동쪽의 달마는 서쪽으로 가시었는데 그 바람은 지금 제 머리위에서 펄럭입니다.
부처님 가신지 2558년, 숭산 행원선사가 가신지 10년이 되는 해 초여름에
시카고에서

제자 대지 림관헌

About the Author
Edward Rim - 림 관헌, 한미 시민 연합 초대회장 역임, 공화당 The President Task Force 멤버, 시카고 전중 앙일보 객원 논설 위원 시카고 한국일보 칼럼리스트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수령 16기 대한만국평화통일자문위원회운영위원(본부) 전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동양철학) 대한민국 평화통일 자문위원 역임, 시카고 상록회 이사장 역임, 시카고 불타사 지도법사, 미 중서부 한미 장학회 회장 역임, 미 중서부 전통 예술인 협회 이사, 상임고문, 성균관 대학교 유학 및 동양철학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