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역사철학, 풍류, 화랑과 Young Korean Academy, 그리고 한류(1)

최치원의 현묘지도, 풍류, 화랑과 도산의 Young Korean Academy

1. 최치원의 <한민족 역사철학>적위치
i). 최치원은 12세(요즈음 셈법으로 11세)되던 868년에 그 당시 동아시아의 대국인 당나라(618-907)에 유학을 떠나 서방의 동로마제국(395-1453), 중동의 모슬림왕조인 스페인의 알안달러스(750-1031)에서 이란의, 사만(819-999), 타히르(821-873) 등 이슬람대국들과 교류하던 세계화된 문물을 접하고, 6년 후인 18세(874)에 과거에 합격, 빈공(賓貢)장원이 되어 20살(876)이 되는 해에 첫 벼슬, 율수(凓水)현위에 나아가고, 879년에는 황소토벌사령관이던 병마도통,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격 황소서(檄黃巢書)>를 써 황소의 난을 평정케 한 공노로 882년, 자금(紫錦)어대(御帶), 삼품(三品)에 이르러 그의 출중한 문장이 당시의 수도장안과 신라에 자자했다.
884년에 아버지의 병이 깊다는 소식을 듣고 문안을 위하여 신라에 돌아가겠다는 소식을 접한 장군 고변은 금품을 내리고, 희종황제는 벼슬을 주어, 신라 헌강왕(875-886)의 내빙(來聘)을 허락하니, 최치원은 견당17년 만에 귀국길에 올라 이듬해(885)에 금의환향하여 충효를 다하게 되었다. 먼저 아버지견일은 6두품인 가계의 신분을 뛰어넘어 총명한 아들이 마음 것 출세 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어린 아들에게 10년의 말미를 주어 반듯이 22세를 넘기기 전에 과거에 합격하기를 지시하였는데 이보다 4년을 앞당겨 빈공중 장원을 하고, 당 희종황제와 고변병마도통의 신임을 받고, 말직에서 받들던 헌강왕의 내빙까지 받았으며, 병상에서 아들을 보지는 못했다하더라도 어린 나이로 인백기천하여 부친의 바람을 성취하였으니 그보다 더한 효도는 없을 것이며, 통일신라가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경문-헌강왕대를 내외적으로 도울 동량재가 되었으니 이 또한 충의를 다한 것이라 하겠다.
ii). 이에 대하여 다음 왕조인 고려 인종 23년(서기1145)에 발간된 삼국사기 본기 진흥왕 37년 조에, 찬자(撰者) 김부식(1075-1151AD)이 인용한 난낭비(鸞郎碑) 서문에는 <우리나라에는 현묘(玄妙)한 도가 있다. 이것을 풍류(風流)라 하는데 그 설교(設敎)한 연원은 우리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 한다>고 하여, 최치원이 신라의 화랑도가 우리 민족의 역사철학을 체계화한 풍씨(風氏)의 시조인 복희시대의 8괘문화로 최치원이 이를 풍류라 한 것이다.
최치원은 <풍류는 모든 사람과 접(接)하여 그들을 교화하였다(接化群生)>고 하면서, 계속해서 이 <또한 집에 들어와서는 곧 효도하고(且如入卽孝於家) 나와서는 충성하니(出卽忠於國), 이것은 곧 노나라 사구인 공자(孔子)의 종지(魯 司寇旨之也)이다>하고, 또 이어서 <하고자 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며(處 無爲之事), 말없이 행하라 가르친 것은(行 不言之敎) 주나라 주사인 노자(老子)의 큰 가르침이다(周 柱史之宗)>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를 가르켜, <여러 악한 짓은 하지 말고(諸惡莫作), 착한 일은 많이 받들어 행하라(諸善奉行)한 것은 천축 국 태자의 교화다(天竺 太子化也)>라고 짧게 기록하고 있다. 석가의 8만대장경(大藏經), 공자가 편집한 삼경(三經)사서(四書)와 5천자의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겨우 8자-12자로 줄여 말하였으니 이 또한 몇 사람이나 그 뜻을 꿰뜨려 보고 이해를 할 까?
필자는 위에 든 삼국사기의 기록은 왕명으로 난랑이라고 이름을 가진 한분의 특출한 화랑에 대한 일대사를 비명으로 새겨 논 것일 것으로 계속되는 설명(說明)이 서문에 이어, 이후 비명 본문에서 자세하게 밝혀 놓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최치원이 남긴 다른 사산비명(四山碑銘)을 보면, 그의 뛰어난 학문과 풍부한 역사적 증명으로 아름다운 문장이 함께 화랑, 난낭의 공적과 사상이 잘 설명되었으리라 믿는다. 특히 이 난낭비명과 많은 부문에서 중복되었을 것으로 믿는 대 승복사비명의 동시대 역사 사실(史實)은 그 뒤에서 난낭비 비명에 경문대왕의 공덕이 더 많은 정보로 새겨져 있으리라 믿게 된다.
필자는 난낭비도 사산(四山)비명(碑銘)에 보는 다른 큰 스님들의 비명이나 이상현 역 고은집에 나오는 장(狀), 표(表), 기(記) 등 다른 최치원의 명문장을 보면서, 이 난낭비의 본문에 들어 있을 내용을 짐작할 만 하다. 그리고 이 난낭비명은 그 서문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개국, 개천(開天)이래로 우리 조상들이 지닌 우리민족역사관<歷史觀>내지 <역사철학(歷史哲學)>을 통해 흐르는 일관지도(一貫之道)인 천부삼인(天符三印)의 전통, 풍류, 현묘지도, 화랑으로 연결되는 삼신(三神一體)을 회통(會通)하는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난낭인 이 비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조차 확인되지 않아 그 비의 서문이 최치원의 사상을 은근히 난낭에 의탁해서 피력한 것이라는 주장은 없으니 비명의 주인공으로 추측되는 경문왕의 별명(풍월주=대화랑)이 난낭인지에 대하여는 과학적 증거, 다중증거가 없는 한 다른 학인들의 주장을 증거도 없이 부인해서도 안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필자의 생각과 다른 통설은 난낭을 보통명사인 화랑, 국선, 풍월주로 하고 경문왕이나 다른 풍월주 등, 특정인을 지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실에서 위탁한 비명을 쓰는 고운의 태도는 언제나 그 부탁하거나 명령한 사람의 입장에서, 특히 진존(至尊)인 왕왕(王命)일 경우,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임으로 자기 뜻을 나타내지 않았음을 짐작한다면 난낭은 뛰어난 국선이요, 풍월주요, 명군이 된 경문왕의 위업(偉業)대한 업적을 선양(宣揚)한 것이 옳다고 본다.
이 비명의 서문을 화랑도가 신라에서 국선제도로서 태어나는 삼국사기 진흥왕 37년(576년)조에서 읽는 것은 이것이 화랑 일반에 대한 것이 지만 이 비가 세워지는 것은 진성여왕(889-899)대라, 300여년이 지난 다음의 난낭화랑이라는 특정인인 화랑의 공덕비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4산 비명 등 다른 전기(傳記)에서 보듯이 춘추필법에 따라 논리에 합당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역사관은 최치원이후,

iii). 그리고 삼교의 범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학설이 분분하고, 유불도(儒彿道), 유불선(儒彿仙), 나아가서 모든 종교와 제자백가의 종지를 지칭한다는 등, 여러 주장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시대에는 이미 삼교회통, 삼교일리 등 우리나라 특유의 제가회통(諸家會通)사상이 지배해 왔고, 가장 큰 종단인 불교 종파 내에서도 분열이 아니라 서로를 총화, 회통하였는바 이는 삼신(三神)을 일신(一神)의 세가지 용(用)으로 보듯, 우리민족성인인 겸양지덕과 일통(一統)사상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삼국사기에 <난낭비 서>라고만 했기 때문에 다른 최치원의 오대비명(五大碑銘) 중 사산비명의 구성과 같이, 서(序)의 성격의 머리말을 따로 구분해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그런 생각도 해보지만 고운의 다른 비명 문장구성 스타일로 보아 비명의 앞부분이나 뒷부분에 본 문장과 구분하여 쓰여 있었으리라 보여 진다.
그가 귀국하여 얼마 되지 않아 지은 것으로 알려진 진감선사비명 첫머리에 “사람은 도에 멀리 있지 않고, 나라에 따라 차별이 없다(道不遠人人無異國)”고 쓴 것도 선생의 이와 같은 사상을 앞세우는 삼교회통, 자리이타의 박애와 겸손한 군자지도를 바탕으로하는 문장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당나라에 있는 동안은 물론 귀국 초까지도 선생은 우리 민족고유의 역사철학에 깊이 통달하지 못했던 것은 진한을 이은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했다는 발해(대진국)를 경멸하면서 신라가 진국을 이었다고 주장한 것으로도 짐작이 가거니와 이미 진국(발해)에서 유행하던 천부경을 접하고 그것을 한자로 번역하면서 크게 깨쳐, 위대한 선생의 진면목을 보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난낭비 서문에서 풍류와 화랑으로 모든 종교와 학설을 포함하는 우리역사철학의 시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운의 우리역사철학이 고려의 원돈중, 이암 등과 조선조 초기 세종, 김시습을 거쳐 최수운, 계연수, 도산, 함석헌등으로 이어져 현재 한류로 이어져 왔다고 보아진다. 이차세계대전의 결과로 36년이라는 일본제국주의의 혹독한 탄압으로 우리역사철학과 국통맥의 훼손이 컸지마는 미국의 건국정신으로 훈련된 흥사단, 국민회의 등 애국단체와 상해 임시정부의 국통을 이어 받은 대한민국이 탄생함으로서 마침내 도산의 무실역행충의용감정신으로 대한독립을 성취하였으니 이제 우리들이 누리는 번영을 바탕으로 선진문화와 부국강병으로 나라와 민족을 지키고 발전시키는데 도산의 제자로서 무실역행 충의용감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실천하기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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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Rim - 림 관헌, 한미 시민 연합 초대회장 역임, 공화당 The President Task Force 멤버, 시카고 전중 앙일보 객원 논설 위원 시카고 한국일보 칼럼리스트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수령 16기 대한만국평화통일자문위원회운영위원(본부) 전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동양철학) 대한민국 평화통일 자문위원 역임, 시카고 상록회 이사장 역임, 시카고 불타사 지도법사, 미 중서부 한미 장학회 회장 역임, 미 중서부 전통 예술인 협회 이사, 상임고문, 성균관 대학교 유학 및 동양철학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