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선하게 산다는 것 #2(대학의 대동과 혈구지도는 천부3인에서 전승된 것 맞은가?)
천부(天符), 혈구(絜矩)의 도와 5중 증거법의 적용(2015.9.18.)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르침이나,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런 추리에 도달하듯이, 사람은 대자연의 주인인 하늘 즉 저 가장 높은 곳에서 보면, 그 드넓은 우주 안의 한 입자(粒子)일 뿐이며,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는” 주인공인-사회적구성원-백성(民)이니, 그들은 i)하늘=天을 우러러 따르는 것이며, ii)땅=地에 의지하는 것이며, iii)하늘과 땅을 어버이로 삼기 때문에 바로 그 사람가운데는 하늘의 도리와 땅의 덕이 함께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문자기록은 그 출처와 내용이 다양하고 서로 상충(相衝)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학자와 학풍, 시대와 장소에 따라 주장을 달리하며, 진위(眞僞)논쟁과 왜곡(歪曲)논쟁이 그칠 줄을 모른다. 특히 조상들의 인격과 글을 그대로 존중하던 개화기 이전의 아시아 학자들이 서양의 모든 학문의 과학적(科學的)방법론(方法論)을 중시하면서 선대의 저술과 기록에 대한 실증주의를 도입하면서 역사적 사실 뿐 아니라 저술자의 인격과 그 정신까지 분석, 논증하려는 무엄(無嚴?)한 지경에 이르면서 위서와 왜곡이라는 막말을 쓰기에 이르렀다. 청나라가 1860년에 두 번째로 영국과 아편전쟁에서 지면서 천자(天子)에 대한 절대적 충심이 날아가고 과학의 힘이 사대(事大)의 대상이 되고 과학적 실증(實證)이 없는 한, 어떤 글도된 역사기록도 그것을 진실로 인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삼경이 공자가 편집한 것이고 사서(四書)가 공자의 가르침이며, 모든 글(契)이 공자의 학문을 따르는 유자(孺子)들에 의하여 쓰여 지고 ,또 그들을 통해 전해진 글이 진서(眞書)라고 믿던 신의(信義)가 다 살아져버린 것이다.
한국에서도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에 실패한 후, 일부 국내 식자들은 실학, 실증이 신학문의 길로 알고, 1895년 청일전쟁 후에는 일본을 두려워하고 사대하기 시작하면서 일본군국주의에 밀착한 일본학자들의 일본 사대주의와 조선사(朝鮮史) 비하(卑下)에 앞장섰고, 지금까지도 이병도씨를 태두로 하는 주류학파가 한국사를 2100년 전인 삼국사 정도로 잡고 있다. 즉 그 이전인 고조선, 부여(夫餘)사 등을 실제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옛날부터 왕명, 지리, 천문, 일사에 대한 왕궁공식기록을 포함한 고기(古記)나 한 시대의 대 지식인이나 위대한 민족의 스승들이 연구하고 기록한 삼국유사, 삼성기, 화랑세기, 단기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징심록추기, 단군세기 등의 국내기록은 물론 삼경, 사서, 한서, 위지 등 글과 금석문, 지하, 지상 유물 유적 등 인방(隣邦)역사까지도 그것의 진위여부에 대한 고찰도 없이 위서-왜곡이라고 배척하는 망발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서 삼국유사를 예로 들어보자.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에 대한 역사서인 삼국유사는 3국이 멸망한 후 1200여년이 지난, 1280년대에 일연(一然)국사(1206-1289)에 의하여 쓰여 졌다. 그 책명(冊名)이 말하듯 그 대부분이 문자기록으로 남긴 신빙할 만한 시기인 BC100경에서 시작해, 신라가 쇠망하는 AD935까지의 3국의 실사(實史)를 기록한 것이며, 다만 기이(奇異)에서 일부 학파가 답사와 고증을 게울리 하여 실증하지 못한 것을 부정하고, 증거가 없다며, 20세기 중반 이후 숫하게 발굴된 한인, 한웅, 단군시대에 대한 새로운 유물, 유적과 각종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학자적 양심을 속이고 초라하게 부정(否定)만을 일삼고 있다.
삼국유사보다 150여년 앞서 저작된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실제의 역사를 기록하고는 있지만 라당(羅唐)에 편향된 사관(史觀)에 입각하였음으로 몇 백 년 전밖에 지나지 않은 일을 두고 편향되게 기록을 후대에 전하여 우리 조상들의 참된 역사를 일실(逸失)되게 하였다. 이러한 불행을 막기 위하여 당대의 국사이며 역사가인 일연선사가 77세를 전후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도움도 없이 유사를 완간하게 된 것은 큰 다행이다. 우리 한지로 편찬된 삼국유사를 완성한 승 일연은 1283년 보각국존(國尊)에 추대되고, 1289년 입적할 때까지 주석하던 운문사와 유사간행지(遺事刊行址)로 믿어지는 인각사가 지금도 경상북도에 있어 그의 명성과 함께 전해지고, 그자에 중국에서 개발된 다중(多重)증거(證據)법으로 그 것이 실사임이 증명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부 학자들이 안이하고 부끄럽게 유사의 중요부문을 역사왜곡으로 무시하는 비례(非禮)를 저지르고 있다. 이는 삼국유사이외에도 古記를 인용한 각종 고대사기록, 호태왕비문, 삼국사기 난낭비 서, 삼성기, 제왕운, 기, 단군세기, 세종실록 등 우리역사서와 서경, 산해경 등 인방, 隣邦의 기록, 고인돌, 동검, 왕성王城> 신단神壇, 지祉, emd의 유적 유물들이 2증거, 3중 증거4중 증거법 내지 다중多重증거법으로 한인桓因씨, 한웅桓雄씨, 단웅檀雄, 丹熊씨와 천부天符 3재삼才와 대학大學강령綱領등이 객관적과학적역사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