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재통일과 중국양안관계에서 배워야 할 문제들(2013.8.30. 림관헌 이 아침에)
2013.8.29. 3시간에 걸쳐 서울 세종호텔에서 독일통일과정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배우는 “2013 한독워크숍/2013 Korea-Germany Workshop”이 열리었다. 독일은 1949년 5월 연합국에 의하여 분할되고 독일국민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동서독으로 분리 독립되어 1990년 재통일을 이룰 때까지 41년간 분단의 고통을 견디어야 했다는 점에서 제2차 대전을 승전으로 이끈 연합국 미국과 중국, 그리고 다만 전쟁선포만으로 마지막에 전리품만 챙긴 구소련-양대 강국에 의하여 1945년 8월 북위 38도 선으로 분할 점령된 이래 아직도 분단이 고착된 상태로 남아있는 남북한의 운명과 비슷하였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킨 패전국 독일이 치러야 하는 응당한 대가로서의 분단이 그 결과였다면, 우리 대한민국(재중 임시정부)은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의 도움을 받으며 패전국 일본제국주의와 수십 년을 싸운 사실상의 승전집단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한 처사였다. 그것은 전후 전후처리를 목표로 하는 미소양국의 정략적 흥정의 결과였으며 승리에 도취했던 맥아더사령부의 역사적 무지와 안이한 판단의 불행한 산물이었다. 그 당시 국가가 말살된 독일은 인구의 10분에 1에 해당하는 5백만이 희생되고 경제가 파탄된 상태에서 분단의 걸었고 우리한국은 세계 공산패권주의 전초기지로서 민족의 안녕을 권력의 야욕으로 팔아버린 김일성도당의 6.25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또한 10분의 1의 인적희생과 산업경제의 폐허 위에서 남북분단이 고착화 되었다. 국제적 측면에서 볼 때 한 독 중 독일 통일이 더욱 어려울 것으로 판단들을 하였지만 1989년부터 나타난 세계 공산주의 경제이론의 모순이 현실화하여 구 소련권이 붕괴 개편되고 동독의 국민들이 국민투표로 흡수통일을 결의하게 되고 소련의 경제적 이익추구에 맏 물려 1990년 41년간의 분단에 종지부를 찍는 행운을 얻었다. 통일 독일은 지난 23년간 먼저 통일을 성취한 우방으로서 한반도의 통일을 돕는데 여러모로 공헌을 하였는바
이날 한독워크숍도 이러한 양국 민간단체간의 협력관계의 하나로 벌써 14번째를 맞는 평화문제연구소(IPA)와 한스자이델재단(HSS)이 공동주최한 워크숍이다.
이날 민주평통수석부의장 현경대 전 평화문제연구소 이사장의 축사와 광복 후 남한 공산화책략에 맞서 싸워온 산 증인 이철승선생의 축사에 이어 주제발표나선 전 독일연방내무차관 렌트너 씨는 꾸준한 서독정부의 동방정책과 소련과 동독에 대한 경제적 기대와 도움으로 결국은 동독국민스스로가 흡수통일의 국론을 결정하는 과정과 독일 통일을 저지하려는 일부 연합국을 설득하는 과정을 통하여 흡수통일을 이룬 후 1991년 체결된 “2+4조약”으로 통일이 마무리된 점을 들어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통독의 완성사례는 박근혜정부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 프로젝트 비전”은 충분히 한국통일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그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북한 내부의 변화를 기다리며, 평화적 통일에는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고 충고하였다.
동독치하에서 탄압을 받던 바구너 목사(독일공산당 압제희생자연합회 회장)는 동독 국민이 국가적종교인 개신교 신자인 것과는 달리 국가교회가 없는 북한에서는 완전히 국가에 예속한 교회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한국정부는 당국 간 협상에서 어떤 형태로든 인도적 문제를 다루어야 하며 탄압받는 사람들을 주시하며, 남한민간단체들이 라디오와 전단을 북에 보내는 것은 북한주민의 희망을 더 크게 하는 것임을 상기시키었다. 이 두 전문가-경험자는 대체로 박근혜정부의 대복정책에 긍정적 평과와 격려를 보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찰하건데 세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냉전의 결과로 국토가 분단되어 고통을 격은 나라는 동 서독, 남북한, 동서 예멘, 남북베트남 그리고 중화민국과 중화 인민공화국 등이 있었으며 이들 국가들은 모두 평화적인 방법과 무력에 의한 모든 통일방안을 추구하였는데 우리헌법 4조에는 자유민주주의와 평화적 통일을 지향한다고 되어있다. 역사적으로 독일과 예멘은 구 소련권의 경제적 붕괴를 맞아 평화적으로 자유민주주의 통일국가가 되었으며, 베트남은 월남전에 승리한 월맹의 군사적 승리로 세계사적 발전의 방향과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그런가하면 아직도 한반도와 중국의 양안은 불안한 균형관계를 유지하면서 무력r과 정치적 대치를 계속하고 있는 형국이이다. 하지만 중공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으로 부터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로 인정을 받고 있으며, 중화민국은 중공이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대만에 위치한 독립국가로서 그 지위가 약화되어 있으나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점차 문화적 사회적 교류를 증진하고 정상적 국제관계 수준으로 신뢰를 쌓아가며 각종 협약을 준수하고 있는 것은 국제협약인 정전협정, 핵확산금지합의와 1972. 7.4. 공동성명이후 남북 간에 어렵게 타결한 협약을 일방적으로 저버리는 북한 군국(선군)주의 집단이 한반도르 불안과 불신으로 얼룩지게 하는 남북관계와 크게 대조가 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재통일 과정에서 군사, 경제, 인구 면에서 우월했던 남쪽의 월남이 가난하고 모든 면에서 열악한 위치에 있던 월맹에 패배한 것은 비교적 풍요롭게 자유민주주의를 구가하던 월남사회에 반전과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중산층과 종교, 사회지도자들의 반부패, 반정부운동으로 승리에 대한 의구심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살아지고, 후원자이고 동맹국인 미국 내의 반전분위기에 편승한 월남내부의 반정부, 반체제인사들의 선동으로 월남체제의 약화와 붕괴로 이끌어 가게 했던 역사를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한다. 이는 자유와 풍요를 만끽하는 한국의 일부 정치인과 국민들이 북한의 암울한 실정을 알면서도 진실을 왜곡하고 소위 북조선의 “애국역량”이 되어 남남갈등과 종북을 일삼아 한국의 평화적통일 역량을 파괴하고 있음은 우려스러울 뿐 아니라 김장은의 오판을 불러올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들 남남갈등의 소지를 발본(拔本)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강한 군사력과 풍요한 경제력도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과 국민들이 버린 정부는 우방도 지킬 수 없다는 1975년의 베트남 패망을 교훈삼아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경제력과 문화수준이 북한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인 남북관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위협과 공갈에 전율만 할 것이 아니라 통일 후 처형된 월남의 반 정부지도자들과 친 월남지도자들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일반 국민은 물론 반정부, 종북 세력, 용공, 친북성향의 추종자들도 그 역사를 타산지석으로 삼게 하여야 한다. 우리들은 간첩을 잡지 않던 김대중 정부, 국토방위선인 NLL을 불신하고 북한 김정일의 주장에 춤추던 노무현정부의 망발을 잊을 수 없으며,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갖은 거짓과 숨겨진 주장을 일삼던 후보와 추종자들, “나 꼼수”와 같은 무책임한 비판과 비방, 진모 등 소위 진보논객들의 토론의 기본도 팽개친 일방적 억지에 환호하던 용공-친북, 종북세력들의 기고만장하던 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가하면 북한 노동당의 제2중대 같은 정치인들에게 점련당한 일부 진보정당의 대표라는 자의 무지막지한 언어적 폭력에 속수무책이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우파의 분노한 자연발생적 댓글에 문제를 삼는 야당의원들,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종북좌파들의 난무하던 그 험악한 댓글들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속담에 “똥묻은 X가 겨 묻은 X를 욕한다”는 말이 이렇게 맞아 떨어질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