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의 역사철학-주변이야기
헐버트, 서재필, 안창호와 대한독립운동
거수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1863.1.26.-1949.8.5.)의 한글사랑과 한국독립을 위한 놀라운 활동에 대하여 감동적인 비디오를 발굴하여 우리 흥사단 미주위원부의 단우들과 그 분의 위대한 업적을 공유하고 우리 대한사람의 충의를 새롭게 하여 주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주 쉽게 자신의 가까이 있는 것에 만 정신을 빼앗기고, 그 뿌리와 근본을 잊고 들리는 소리와 경게(境界)에 정신을 빼앗겨, 그 꼬리를 따라가기에 바뿐 자신을 발견하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본 같은 비디오를 다시 올린 이 단우의 카톡 비디오를 다시 보고 적고, 또 보고 적고, 그렇게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헐버트 선생의 한글사랑, 한국사랑과 독립운동이 헐버트선생보다 1년 연하인 서재필(1964-1951)박사와 15년 연하인 도산(1878-1938)선생에게도 직접, 간접으로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갔게 하였습니다. 서재필은 18세(1882)에 중광시에 장원하고, 2년 후,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다음해 미국으로 건너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대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개업하고, 미국시민과 결혼 1남 3녀를 두고 미국시민으로 살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자 동지 박영호의 권유로 귀국하여 고종과 미국사이를 연결하였으며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영국과 같은 의회민주주의인 입헌군주제로 대한의 자주독립을 주장했으나 고종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도산 안창호는 1902년 미국유학길에 올라, 하와이를 거쳐 1903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으며 곧바로 그곳 동포들의 비참한 생활을 개화시키기 위하여 한인친목회를 시작으로 리버사이드 한인친목회와 전국 규모의 공립협회로 확장하고, 공립신문을 발행 세계한인사회에 보내고, 국민회와 흥사단을 창설하여 재미한국인 뿐만 아니라 멕시코, 만주간도, 노령 연해주까지 연결하여, 재외국민을 독립운동단체로 조직하는 장하고 대단한 일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위한 후원금을 모금, 1919년 3.1운동으로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정부의 실질적인 중심인 국무총리서리로 정부를 이끌고 아침마다 업무시작 전에 애국가를 부르는 조회를 실시하여 정신수련과 대공정신을 함양하여 대한인의 공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실천하였으며, 대한독립의 토대를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위키백과와 전기 비디오의 호머 헐버트 기사를 보면 그는 순 한국이름인 <헐벗>에 맞게 라틴어 등 7개 국어를 공부한 그가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에 매료돼, 한글과 한국문화를 미국에 홍보하는 한편, 한국 고종황제의 측근으로 황제를 도와 자문역과 특사가 되었으며 특히 한글 띄어쓰기로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한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1907년 이준, 이상설 등과 은밀한 연대작전으로 헤그 밀사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 의하여 미국으로 추방되었으나 일생을 한국독립운동에 몸을 바치어, 안 중근 의사는 1909.12.2.일경, 신문을 받던 중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1949년 광복을 되찾은 대한민국정부는 그를 광복절행사에 초청하였으며, 그는 86세의 노구를 배에 태워, 40년 만에 조선에 돌아왔으나 여독으로 입원 7일 만에 서거하여,,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고,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 2014년 금관문화훈장, 2015년 제1회 아리랑 상을 수상했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이 비디오에서는 1886년 교사모집에 지원한 헐버트가 <육영(育英)공원(公院)>교사가 되어 과거합격자나 신진사류를 교육하면서 4일 만에 한글을 체득하고 1889년에 저술한 <ᄉᆞ민필지>는 최초의 한글판 세계지리서를 저술하여서 한글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으며, 그가 육영공원의 재정삭감으로 1891년, 5년 만에 귀국했다가 다시 2년 뒤인 1893년 감리교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들어와 배재학당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와 제자 주시경은 미국에서 돌아와 독립협회를 창립한 서재필의 요청으로 독립신문을 공동발행하고 고종황제를 자문하다가, 1907년 헤그밀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는 1893년 시카고박람회에서 조선을 소개도 하였고, 미국에 영주귀국 해 있는 동안에도 신문기고, 논문 등을 통해서 대한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니 미국에서도 독립신문을 같이했던 서 박사와 교류하였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기록이 없고, 1924년 도산이 무고를 받아 미국비자가 거부 되었을 때도 서 박사 뿐 아니라 헐 박사의 도움도 있음직 하지만 그 때 도산이 서 박사외에 헐 박사를 직접 맛났다는 기록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참으로 아쉬운 인연이었나 봅니다.
흥사단 미주위원부 수석부위원장 림관헌 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