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가나안을 아는가?-#40-을 억지로 읽고(림관헌2010.1.12. 칼럼)
시카고에서 발행되는 J한국어일간지에 벌써 40번째의 전면광고가 실리고 있는데 그 지면에는 “전면광고” “가나안 명상”이라는 중간제목도 있지만 그 광고의 큰 제목이 “너희가 가나안을 아는가?(40)로 되어있는데 위압적이고, 무례하고, 기분상하는 기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많은 독자들은 그 신문 6면을 꽉 채운 광고기사를 보면서 그것도 자주 똑같은 포맷트로 나와 실증을 느낄 것이고, 몇 해인가를 그 필자-목사와 대립했던 반대파 가나안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거부감, 불쾌감을 느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희가 가나안을 아는가? 모르면 입 다물고 목사인 내말을 따르라. 그래야만 복을 받을 것이며 나를 내 보내려 나에 맛서 싸움하던 너희들과 나의 적들에게 응원을 보내던 너희들도 회계하고 내 말에 순종하라 하는 무언의 지시를 하는 듯 위압감을 준다. 그렇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두려움은커녕, 왜 우리가 그 추잡한 싸움판을 벌린 가나안을 알아야하느냐고 되 뭇고 싶게 된다. 그 뿐인가? 오늘 억지로 강요하는 말투에 밀려 그 내용을 읽어보니 그 또한 가관(可觀)이 아니다.
이번 호에서는 (1) 우리들에게 일상화되어있는 새해인사를 평하면서 “미국에서의
화두는 그가 말한 대로 불교용어이고 불교용어인 이상, 자기 상식이 아닌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가 무엇인지는 알아보고 그 용어를 끌어들여야 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요, 옳은 길일 것이다. 화두는 그가 말한 대로 대통령의 신년사의 중점을 몇 개 단어나 네 글자로 요약한 사자성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진리의 본체를 찾는 “의문의 덩어리”를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학승이 X 떨어지는 소리가 한참 후에야 들리는 절간 해우소문 밖에서 <부처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큰 스님이 <건 시걸=마른 X막대기>했다면 바로 <건시걸>이 화두가 되고 무(無)했다면 그 한자가 화두가 되어, 그 학승은 그 화두를 자나 깨나 놓치지 않고 그 의문덩어리를 참구(參究)하여 어느 순간 그 의문을 깨치고 그 진리를 알아버리게 되는 한 공부법의 수단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목사는 엉뚱하게 화두라는 말을 제 멋대로 해석 독자들과 신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회개할 일이 아닌지?
광고는 계속해서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3)<노력하는 한해> (4)<지혜로운 한해> (5)<배려할 줄 아는 한해>가 되어야 한다며 장괄 설을 늘어놓고 <이목구비(耳目口鼻)>라는 단어가 4자성어라며 올해 가나안의 사자성어(화두)는 이런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 아마도 그 목사님은 귀로 듣는 것이 중요하며 눈, 입, 코는 뒤로 해야 한다는 말(입)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듣는 것을 제일 중요시하는 것이 어찌 가나안의 이 목사뿐일까?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말하는 것보다 듣는 편이 더 중요하다는 것 다 알지만 실천하기는 힘든 일이다. 이제 가나안이 남의 말에 귀를 기우리는 것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잡았다면 많은 사람들의 귀와 눈을 거슬리는 일들은 삼가야 할 것이고 우리가 더는 알고 싶지도 않은 광고로 “너희가 가나안을 아는가?”하며 가나안의 입을 주목하라는 소리는 그만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광고를 연재하는 일간 신문(필자도 독자)에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광고는 신문사의 경제적 젓줄이고 광고의 내용이 반사회적이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인 이상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독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광고는 독자들을 떠나가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감안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방적이고 주입식이며 독자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 기록은 그것이 신문사의 의견이 아닌 광고라도 독자들에게 신문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흘러가게 할 염려가 있음으로 그 형평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