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가슴에 깊숙이 자리한 링컨의 연설문(2021.12.29. 림관헌 이 아침에 칼럼)
1953년 겨울의 끝자락은 지독히도 춥고, 모든 국민의 살림이 말이 아니었지만 국토의 대부분이 북괴군이 남한지역의 대부분을 점령, 근 3개월 간 통치했으며 우리 집에도 수십 명의 징모된 노무자가 사랑채 안 박을 점령기간 내내 수시로 배당되어 꽁 보리밥으로 연명하며 숙식을 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패퇴하면서 수많은 지식인과 중산층 평민이 반동으로 몰려 생명과 재산을 빼앗기고 빈민화 되었고, 북한, 남한, 중공의 군경을 비롯한 전투원들의 희생이 계속되면서, 소련과 연합군의 휴전협정이 2년 채 접어들고 있을 때, 학제가 바뀌어 5년이던 중학교가 중학-3년, 고등-3년으로 바뀌어 수산중학교 3년생인 필자도 준비도 없이 수산고등학교에 세사는 보령중학생이 되어 고등학교 진학시험을 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 당시 학부모님들은 어떻게 하면 아들을 죽는 자리인 군인에 보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필자도 부모님들의 걱정도 덜어 들이고, 학비도 절약되어, 무도한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새롭고 자유로운 미국과 같은 민주국가 될, 자유대한의 일꾼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진학할 고등학교를 선택하려고 딴에 심사숙고하게 되었었다. 각도별 로 특기, 인문계, 실업계고등학교로 입학시험 마감이 있었는데 나는 일찌감치 체신학교로 특기시험으로 합격통지를 받고 안심하고 있다가 충청도의 인문계에 다시 입학수속을 해, 홍성고에 입학했는데 이는 법관이되 길 원하는 삼촌의 강권에 따라른 것이었다. 사실 특수학교인, 철도학교, 체신학교 학비와 직장이 보장되고 대학진학도 가능해서 출신학교의 추천을 통해 입학시험에 갈수 있고 나를 아껴 주시던 한문선생님이 아버님께 귀 띰 해주셔서 촌놈이 여비가 아니라 쌀자루를 메고, 걷고, 타며 4일간, 몇 개의 전국체신학교입학시험장 중 가장 가까운 대전으로 먼 여행을 떠나 겨우 시험을 치렀다. 지금 생각해도 이건 무모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OX선다형도 아니고 필기시험에 촌 학교 수석도 아니고 2등-삼등을 다투는 학생이 경기, 배재, 보성 등 명문중학생들과 40-50대 비율이라는 입학시험을 겨룬 것은 말도 안 되지만 아무 걱정도하지 않고 시험을 치루고, 가장 어려운 영어는 물론 국어, 수학을 잘 썼다는 기쁨에 차, 먼 길을 혼자 다녀온 것만으로 다행히 생각하시는 어머님을 안심하시게 한 기억이 난다.
그것도 그럴 것이 한문을 또래에서 제일 많이 배워 국어도 OK, 수학은 아주 좋아했고, 영어는 운이 좋았기 때문에 아마 최고 답한을 썼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6.25로 피난 온,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있었다지만 시골 중학영어 실력으로 어떻게 링컨대통령의 Gettysburg Address에서 출제한 영어시험문제를 꿰뚫어 문장을 마들어 답안을 쓸, 중학생이 있었을까? 근데 난 영어교과서인
국민주권-민주주의국가(the government of the people)는 자연히 국민전체의 행복을 위한 것이며, 그것은 국민 한 사람의 한표, 한 표로 세워져, 그 한 표가 그 주인임으로, 우리 이민 선배 지도자 안창호가 “거짓말은 꿈에서도 하지 말라”는 명언과 같이 이를 배척해야 한다.